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천년(天年) 또는 장지(藏之). 조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유공권(柳公權)이고, 아버지는 좌복야(左僕射) 유택(柳澤)이다.
과거에 급제해 고종 때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유천우(兪千遇)와 함께 오랫동안 정방(政房)에 있으면서 특히 최항(崔沆)의 신임을 받았다.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의(崔竩)가 뒤를 이어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행패를 부려 민심을 잃게 되자, 1258년(고종 45) 3월 별장 김준(金俊) 등과 모의해 최의를 죽이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였다.
최씨 무신정권을 타도한 공으로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이 되어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겸임하고 4월 추성위사공신(推誠衛社功臣)에 봉해졌다. 유경의 고을 유주(儒州: 지금의 황해도 文化)는 감무현(監務縣)에서 영현(令縣)으로 승격되었다.
이 때부터 정방을 편전(便殿)에 두고 전주(銓注: 인물 등용과 배치 업무)를 장악해 국가의 기무(機務)를 결재하였다. 그 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고, 1259년 6월 고종이 유경의 집에서 병사하였다.
1262년(원종 3) 12월 수사도 지문하성사 태자소부(守司徒知門下省事太子少傅)가 되었고, 이듬해 12월 수태부 참지정사 태자태보(守太傅參知政事太子太保)를 거쳐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1269년 4월 대사성 김구(金坵) 등에게 임연(林衍)이 김준을 죽이고 공신이 된 사실을 비난했다가 이를 엿들은 환관 김경(金鏡)의 고발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는데, 10월 석방되었다가, 다시 유배되었다.
1270년 5월 삼별초(三別抄)가 봉기했을 때 강화도에서 탈출해 돌아와, 삼별초와 내통할 것을 두려워하던 왕이 크게 기뻐하며 후대하고 평장사 판병부사(平章事判兵部事)로 임명하였다. 이듬해 1월 파직되어 애도(哀島)에 유배되었으나 3월 소환되었다.
1276년(충렬 2) 7월 첨의시랑 찬성사 감수국사 판판도사사(僉議侍郎贊成事監修國史判版圖司事)가 되었는데, 이 때 두 번이나 무고를 당했던 김방경(金方慶)을 구하였다.
1278년 4월 찬성사 판전리사사(贊成事判典理司事)에 올라 은퇴할 것을 청해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1289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