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향은 고려후기 제25대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한 문신이다. 1243년(고종 30)에 태어나 1306년(충렬왕 32)에 사망했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무신집권과 원의 간섭 등 국내외적 위기를 해결할 대안으로 주자학을 생각하고 1289년 왕을 호종하여 원에 가서 주자서를 손수 베끼고 주자의 화상을 그려왔다. 이어 공자 사당인 문묘 설치를 위한 준비와 인재양성을 위한 재정적 기반으로 섬학전 설치를 주도했다. 1542년(중종 37)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사우와 백운동서원을 세워 그를 기렸다.
경상북도 흥주(興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 출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초명은 안유(安裕)였으나 뒤에 안향(安珦)으로 고쳤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글자였으므로, 이를 피해 초명인 안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회헌이라는 호는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아버지는 밀직부사 안부(安孚)이며, 어머니는 강주 우씨(剛州禹氏)로 예빈승(禮賓丞) 우성윤(禹成允)의 딸이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하였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郎)이 되었고, 이어서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였으며,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해 안향은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에 부임하였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다. 그 뒤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 · 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1289년 2월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郎)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그 해 11월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이듬 해 돌아왔다. 그 해 3월 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했고, 이어서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그 해 12월 지밀직사사,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에 갔으며, 이듬 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그 해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인 충선왕이 즉위하자 관제가 개혁되어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 兼 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그 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그 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고, 이듬 해 수국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올랐고, 얼마 뒤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 밀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 · 악기(樂器) 및 육경(六經) · 제자(諸子) · 사서(史書) · 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한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자로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 해 12월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1304년 5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일종의 장학기금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써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그 해 6월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㦃) · 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당시 원나라에서의 주자학의 보편화와 주자서의 유포 등에 따른 영향도 있었지만, 안향이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오가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또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제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주자학이 크게 일어난 것으로 보아 안향을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평가할 수 있다. 주자학이 성행한 당시 남송(南宋)의 사정이 금나라라는 이민족의 침입 앞에 민족적 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던 때라면, 당시 고려 후기의 시대 상황 역시 이와 비슷하게 무신 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골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때에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의 정신, 그리고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修養論) 등의 특성을 지닌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이 바로 안향의 이상이었다.
또한 안향은 자신의 이상을 학교 재건과 인재 양성을 통해 이룩하려 하였다. 안향이 당시 고려의 시대 상황을 자각하고 주자학이 가진 이념이나 주자학 성립의 사회 · 역사적 배경을 의식하여 당시 고려의 위기를 구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제반 교육적 활동을 전개했다면, 안향을 단순하고 소극적 의미의 주자학 전래자로 보기보다는, 적극적 의미에서 ‘주자학 수용자’로 유학사(儒學史) 내지는 교육사적인 위치 설정을 해도 좋을 것이다.
1306년 9월 12일 별세하자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이 안향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해 안향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안향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 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또한 1643년(인조 21)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임강서원(臨江書院)을 세웠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