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동림동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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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목조건물터 · 우물 등이 발굴된 마을터. 취락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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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광주 동림동 유적은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형성된 대규모 취락유적이다. 이 유적에서는 원삼국∼삼국시대의 98동의 주거지와 삼국시대 목조건물 1기, 64동의 창고시설, 우물, 도로, 배수로, 수리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 확인된 취락 구조와 경관은 영산강유역에서 종래 확인된 바 없는 사례이다. 기존 취락의 조성 흔적이 없는 공백지에 계획된 도시 규모의 취락을 탄생시켰고, 인공배수로와 도로를 건설하고 우물을 조성해 안정된 식수 공급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목조건물터 · 우물 등이 발굴된 마을터. 취락유적.
개설

광주 동림동 유적은 98동의 주거지와 목조건물지군, 64동의 창고시설, 저장수혈, 도수시설, 우물, 도로, 배수로, 수리시설 등의 주거단위가 어우러진 대규모 취락유적이다. 경질무문토기( 민무늬토기) 단계 이후로 일정한 공백기를 거친 후, 광주천을 낀 널따란 충적대지를 무대로 계획적인 도시 규모의 취락으로 재탄생된 유적이다. 도시 중심부에는 길이 50m, 너비 12m 규모로 구획구(區劃溝)를 만들어 일반 구성원들의 거주 공간과 구별짓고 그 내부에 65호 건물지군(5동의 지상식 건물)을 건축하였다. 유적의 중심연대는 5∼6세기이다.

내용

광주 동림동 유적은 광주천변의 충적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확인된 유구는 청동기시대 저습지 1기와 삼국시대 목조구조물 1기, 원삼국시대∼삼국시대 주거지 98기, 원삼국시대∼조선시대 구(溝) 237기, 수혈 114기, 지상건물지 65기, 토광 2기, 우물 2기 등이다.

원삼국시대∼삼국시대 주거지는 98기가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벽선이 확인되는 것이 86기, 벽선이 없이 4주공만 확인되는 것이 12기이다. 중복양상은 적게는 2기, 많게는 5기 정도로 중첩되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대부분 방형계이며 크게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 주거지로 구분된다. 원삼국시대 주거지는 경질무문토기만이 확인되는 것으로 1기가 조사되었는데 평면형태는 부정형을 띠고 있다. 삼국시대 주거지는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가 공반되어 출토되는 것과 타날문토기와 회청색경질토기가 출토되는 주거지로 나누어 파악할 수 있다. 주거지의 장축방향은 주로 북서-남동과 북동-남서방향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동-서, 남-북 방향보다 일조시간을 길게 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가진다. 부뚜막은 대부분 주거지의 북벽과 북서벽 중앙부에 위치한다. 기둥배치를 보면, 무주공식은 면적이 적은 소형군에서 대부분 확인되는데 소형과 중형의 기준이 되는 13㎡이하에서는 대개 무주공식만이 확인된다. 4주식은 면적이 중형이상에서 분포하고 있는데 소형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주거지 중에서 벽구가 있는 주거지는 65%를 차지하고 있어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배출구는 주거지 내부의 물을 빼내기 위한 역할을 수행하며, 벽구와 연결되어 있으며, 주거지 주변에 있는 도랑과 맞닿아 있어 물을 배수하기 위한 기능이 큰 것으로 보인다.

동림동 유적에서 구(溝)는 모두 237기가 조사되었는데, 이 중 17기 정도는 총 길이가 100m 이상으로 대형에 속한다. 출토유물은 모두 2,563점으로 대부분 토기류이고, 이외에도 토제품 82점, 석기류 6점, 철기류 1점 등이 있다. 구는 평면형태, 단면형태, 퇴적토 내 유물출토 양상 등을 통해 3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가진 도랑을 들 수 있다. 도랑은 취락 내 물과 관련한 주입 및 배수의 기능, 수전(水田)과 관련된 수로의 기능 등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단면형태는 대부분 ‘U’자형이다. 두 번째는 매장 및 의례행위와 관련한 주구(周溝)이다. 주구는 원형이나 방형 등의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면서 단면형태는 대부분 ‘U’자형에 가깝다. 내부에서 유물이 출토되는 경우가 많은데 유물의 출토양상은 쓸려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행위에 의해 매납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일반적인 도랑의 형태와 같지만 퇴적토내에서 매장과 관련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는 경우와 유물은 전혀 출토되지 않지만 형태상 분구묘와 관련된 주구의 형태를 띠고 있어 주구의 기능을 가진 경우도 해당된다. 세 번째는 환호의 기능을 들 수 있다. 일반적인 도랑과 같은 기능을 가지면서 축조된 위치가 전체 유적 내에서 방어나 공간분할 등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해당된다. 비교적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수혈은 총 114기가 확인되었으며, 평면형태는 원형, 방형, 부정형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일부 수혈에서 호형토기, 발형토기 등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저장시설로 추정된다.

지상건물지는 모두 65기가 확인되었다. 건물지의 축조위치와 군집의 양상을 보면 수혈주거지와 반비례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천이 넘치는 경우와 홍수의 경우에 수혈주거지에서 더 이상 생활하지 못하고 이러한 계절상의 특징을 피하기 위해 생활공간을 지상으로 이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5호 건물지군은 단순한 창고시설이나 일반 건물이라기보다는 제의적 목적 또는 집회장소, 취락 내 최고 권력자가 관리하고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65호 건물지군(5동의 지상식 건물)의 내부 정중앙 지점에는 35개의 기둥을 세워 정면 6칸×측면 4칸 규모의 대건물지(15m×9m)를 세웠다. 대건물지 양편에 다시 정면 3칸×측면 4칸 규모의 중건물지(8m×7.2m) 2동을, 가장 바깥쪽에는 정면 2칸×측면 3칸 규모의 소건물지(5.5m×4m) 2동을 동-서 측면에 각각 건축함으로써 총 5동으로 구성된 지상식 목조건물지군이 완성되었다.

토광은 2기가 인접하여 확인되었는데, 1호 토광은 토기를 의도적으로 파쇄한 후 매납한 양상을 보인다. 우물은 2기가 확인되었다. 1호 우물은 목재를 이용하여 축조하였고, 2호는 목재와 석재를 혼합하여 축조하였다.

동림동 유적 취락의 중심에서 다소 떨어진 Ⅲ구역 동쪽 지점에서는 청동기시대 저습지와 삼국시대 목조구조물 등이 발굴되었다. 저습지 내부에서는 수많은 자연목들과 함께 청동기시대 전기로 편년되는 이중구연단사선문에 구순각목이 시문된 토기와 완형의 [弓], 고무래, 자귀자루 등 호남지방에서 처음 출토된 다양한 목기들이 확인되었다. 목조구조물은 횡목, 걸침목, 말목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10m 이상의 소형구조물 3개가 하나로 이어지는 형태로 하천변에 설치된 순수 목조의 보(洑) 시설로 판단된다. 내부에서는 소량의 연질타날문토기, 개(蓋), 배(杯), 적층목편(積層木片) 등이 출토되었다. 이 중 적층목편으로 명명된 유물은 나무껍질을 압착하여 지붕의 재료로 사용되는 예로서 ‘히노키’로 명명된 일본의 신사(神社) 내 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동림동 유적에서 확인된 취락 구조와 경관은 영산강유역에서 종래 확인된 바 없는 사례이다. 특히 65호 건물지군의 주인공은 64동에 이르는 창고시설의 조성과 관리를 직접 관장한 인물로 볼 수 있다. 기존 취락의 조성 흔적이 없는 공백지에 계획된 도시 규모의 취락을 완성해 나가면서 도로와 배수로를 개설시키고 취락 내부에 10개 소에 가까운 주거군을 조성하여 구성원들을 관장하였던 우두머리의 모습은 영산강유역의 다른 거점취락에서는 찾을 수 없는 중심취락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공 배수로와 도로를 건설하고 우물을 조성하여 구성원들에게 안정된 식수를 공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농업생산의 극대화를 위한 수리시설을 구축하여 거주민들의 식자원 확보를 안정화시켰다.

3,500점에 달하는 유물 가운데에는 현지산은 물론, 백제계, 가야계, 왜계, 고창계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다양한 외래 유물과 창고시설의 존재는 동림동 중심취락 안에서 소비되기에는 매우 많은 양이다. 일본 스에키와 소가야토기 등의 외래토기가 출토됨은 교류에 종사한 가야인과 왜인들의 도시 내 거주를 상정해 볼 수 있는 자료인데, 동림동 유적 일대는 당시 남해안-서남해안-영산강으로 이어지는 물류의 거점지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을 것이다.

참고문헌

『광주 동림동유적Ⅰ∼Ⅳ』(이영철 외, 호남문화재연구원·대한주택공사, 2007)
「백제 지방도시의 성립과 전개」(이영철, 『한국고대사연구』 81, 2016)
집필자
이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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