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락을 감싸는 형태의 도랑이 만들어지는 시점은 청동기시대부터이다. 이러한 취락을 환호취락(環濠聚落)이라고 부른다. 환호취락은 이후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에도 이어지고 삼국시대 이후에는 본격적인 성곽의 축조와 함께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청원 쌍청리유적에서 보듯이 일부 명맥이 이어진다.
정주생활이 이어지면서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서 환호가 등장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에 해당되는 하남성 서안시(西安市) 반파(半坡)유적과 섬서성 임동현(臨潼縣) 강채(姜寨)유적에서 환호가 나타난다. 내몽고 지역의 흥륭와(興隆窪) 백음장한(白音長汗)유적은 서기전 5000년경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에서는 청동기시대 이후 본격적인 환호취락이 등장하여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에 걸쳐 널리 축조되었다. 일본에서는 큐슈〔九州〕사가현〔佐賀縣〕요시노가리〔吉野ケ里〕유적, 오사카부〔大阪府〕이케가미·소네(池上·曾根)유적, 나라현〔奈良縣〕카라코·카기〔唐古·鍵〕유적 등 야요이〔彌生〕시대에 환호취락이 많이 축조되었다. 일본의 환호취락은 한반도 남부의 청동기문화, 쌀농사가 일본으로 전해질 때 함께 들어간 것이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발굴조사된 환호취락은 울산 검단리유적이었다. 그 후 진주 남강댐 수몰지역, 창원 남산유적 등 주로 영남지역의 청동기시대 환호취락이 많이 조사되었다. 최근에는 화성 쌍송리유적, 김포 양곡리유적 등 경기지역에서 청동기시대 환호취락이 잇달아 발견되고 있으며 화성 동학산유적, 오산 가수동유적 등 초기철시기대에 해당되는 환호취락도 발견되고 있다.
원삼국시대의 환호취락으로는 서울 풍납토성 내부에서 발견된 것이 대표적인데, 3중 환호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환호취락의 존재가 분명치 않다. 한편 9세기 대에 해당되는 청원 쌍청리유적에서는 일곱 겹의 환호로 둘러싸인 특이한 유적이 발견되어 환호의 축조가 통일신라시대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환호는 그 입지에 따라 평지형과 구릉·산지형으로 나눌 수 있으며 단면의 형태는 U자형과 V자형이 있다. 환호의 기능에 대해서는 전쟁의 발생으로 인한 사회적 긴장감의 고조 속에서 취락을 방어하기 위해 출현한 것이란 견해가 대세를 이루지만 환호의 방어력에 의문을 표하면서 의례적·상징적인 면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혹은 동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 출현하였다거나 ‘우리’와 ‘남’을 구분하는 경계의 의미를 지닌다는 견해도 있다. 이렇듯 환호의 기능과 성격을 모두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방어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환호는 평면적이기 때문에 적의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데에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환호의 안이나 바깥에 토루나 목책을 결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시키기도 한다. 삼한단계의 양산 평산리 환호취락은 환호 내측에서 정연한 목책렬이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의 환호취락으로는 울산 검단리유적, 무거동 옥현유적, 방기리·천상리유적, 창원 남산유적, 대구 동천동유적, 산청 사월리유적, 진주 대평지구유적 등 영남지역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화성 쌍송리유적, 김포 양촌리유적 등 중부지역의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초기철기시대의 것으로는 합천 영창리유적, 경산 임당동유적, 화성 동학산유적 등 산 위에 만들어진 것이 많다. 삼한단계의 것으로는 창원 남산유적과 양산 평산리유적, 장흥 지천리유적, 서울 풍납동유적 등을 들 수 있다.
환호의 등장은 마을 안과 밖을 구분하면서 ‘우리’와 ‘남’을 구분하는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전쟁 시에는 마을을 지키는 방어시설의 기능을 한다. 환호의 등장은 사회적인 긴장감을 반영하며 그 내면에는 농업의 진전으로 인한 잉여생산물의 축적, 공동체간 분쟁과 통합,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금속기의 발달 등 사회적 변화가 깔려 있다. 환호의 방어적 측면을 극대화시킨 것이 성곽으로서 삼국시대 성곽의 출현은 청동기시대 이후 발달해 온 환호의 완결판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