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무늬토기 (민무늬)

선사문화
개념
청동기시대에 사용한 무늬 없는 토기.
이칭
이칭
무문토기(無文土器)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민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에 비하여 문양이 없거나 적고, 장석, 석영, 운모 등의 비짐을 섞어 800℃ 이하의 온도에서 소성한 청동기시대 토기이다. 민무늬토기의 형태와 문양은 지역별로 다양하여 한반도 청동기시대 주민들의 시 · 공간적 분포 및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지역에 따라 팽이형 토기, 미송리형토기, 화분형 토기 등이 있으며, 빛깔은 주로 갈색을 띤다.

정의
청동기시대에 사용한 무늬 없는 토기.
개설

민무늬토기[無文土器]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有文土器]에 대비되는 용어로 문양이 없다는 의미이지만, 아가리 부분에 한정하여 빗금무늬[斜線文], 골아가리무늬[口脣刻目], 구멍무늬[孔列文] 등이 새겨지기도 한다.

민무늬토기는 당초에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에 관계없이 선사시대의 조질(粗質) 민무늬토기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점차 발굴 조사가 증가하면서 신석기시대 토기를 계승한 청동기시대 토기로 시대성이 부여된 개념으로 조정되었다.

제작 방법

민무늬토기는 빗살무늬토기와 마찬가지로 성형(成形)-정면(精面)-소성(燒成)의 과정을 거쳐 제작된다. 토기 형태를 만드는 방법으로는 고리 모양 점토띠를 쌓는 테쌓기[윤적법(輪積法)], 긴 점토띠를 둥글게 쌓아가는 서리기[권상법(捲上法)], 손으로 빗는 수날법(手捏法)이 있다.

민무늬토기는 형태를 만든 후에 표면을 정리하는데, 가죽이나 손가락에 물을 묻혀 표면을 다듬는 물손질이 이루어지거나 목판 등으로 표면을 긁고 손가락으로 누르기도 하며, 겉이 맨질한 도구로 토기 표면을 문질러 광택을 내기도 한다.

정면한 토기를 건조시킨 후에는 불에 굽는 소성 과정이 이루어지는데, 신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야외에서 얕은 구덩이를 파고 나뭇가지를 넣어 굽는데, 점차 짚이나 나뭇가지를 위에 지붕처럼 덮어 굽는 덮개형 야외소성이 주로 이루어졌다.

종류와 분포 지역

청동기시대부터 토기 기종이 다양해졌다. 기종 분류가 모두 기능이나 용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끓이는 데 사용하는 자비용 그릇은 깊이가 있고, 저장용은 내용물을 꺼내는 빈도가 낮도록 목이 좁은 경향이 있으며, 음식을 담는 식기는 그릇의 높이가 낮은 점이 있다. 이러한 특성을 감안할 때,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는 자비용, 저장용, 식기로 나눌 수 있다.

민무늬토기는 자비용의 깊은 바리형[深鉢形] 또는 독형[甕形], 저장용의 항아리형[壺形], 식기용의 얕은 바리형[淺鉢形] 또는 완형(盌形)으로 분화된다. 이 외에도 굽다리그릇[豆形土器], 붉은간토기[赤色磨硏土器] 등이 포함된다.

민무늬토기는 지역별로 다양한 토기문화가 전개되는 특징이 있다. 특히 토기 문양과 그릇 형태 차이를 통해 민무늬토기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인지할 수 있다.

한반도 북부에는 압록강 하류 지역의 미송리형토기, 압록강 중상류의 공귀리형토기, 두만강 유역의 덧띠새김무늬토기, 청천강 유역의 겹아가리토기, 대동강 유역의 팽이토기가 전개된다.

한반도 남부에는 전기 민무늬토기 문화로 금강 유역의 가락식토기, 그 외 지역의 역삼동식토기와 흔암리식토기가 전개되며, 중기에는 송국리형토기, 후기에는 덧띠(粘土帶口緣)토기, 검은간토기[黑色磨硏土器] 등이 전개된다.

이러한 다양한 민무늬토기가 출토되는 범위는 시간에 따라 유동적인데, 한반도적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는 범위는 청천강 유역-함경남도를 잇는 선 이남으로 간돌검[磨製石劍], 무덤,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등과 공통성이 가장 두드러진다.

다만, 중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세발달린토기[三足器]가 출토되는 요서 지역과 달리, 요동 지역의 쌍타자문화(雙砣子文化), 요동산지의 마성자문화(馬成子文化)는 삼족기가 조성되지 않고 기종 구성, 무늬에서 민무늬토기와 매우 유사하다.

한편, 고대산문화(高臺山文化)의 세발달린토기는 무덤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민무늬토기와 유사한 호형토기, 고족발(高足鉢), 얕은 바리형토기가 확인되는 등 요서 지역과 요동 지역의 점이적 문화를 형성한다. 따라서 민무늬토기의 분포 경계는 때에 따라 압록강 유역, 태자하 유역, 요하 유역으로 변동한다.

초기의 민무늬토기

가장 이른 민무늬토기는 덧띠무늬[突帶文]토기로 깊은 바리형토기 아가리에 새김한 덧띠무늬를 붙인 것이다. 덧띠무늬토기는 덧띠 형태, 새김무늬[刻目]의 유무에 따라 새김없는덧띠무늬, 새김덧띠무늬, 마디모양[節狀]덧띠무늬, 닭벼슬모양[鷄冠形]덧띠무늬 등 다양하다.

띠무늬가 확인되는 토기로 압록강 유역 공귀리형토기가 있다. 대형의 항아리형 토기에 세로 모양의 고리 손잡이[縱狀把手]를 붙이고 목과 몸통 경계에 덧띠무늬를 붙인 것으로 강계 공귀리, 시중 심귀리 유적이 대표적인데, 남부 덧띠무늬토기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한반도 남부의 덧띠무늬토기는 홍천 외삼포리, 서울 미사리유적, 정선 아우라지, 연기 대평리, 김천 송죽리, 경주 충효동, 순창 원촌, 진주 대평리, 사천 본촌리 유적 등 내륙의 하천변 충적대지에 주로 분포한다. 덧띠무늬는 겹아가리와 더불어 연해주, 중국 동북지역 일대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확인되는데, 한반도 남부 덧띠무늬토기의 기원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논의되고 있다.

하나는 덧띠무늬의 존재와 집자리의 유사성을 근거로 압록강 중상류[공귀리형토기] 혹은 요동반도[마성자문화] 주민들이 남하하여 출현했다고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매부리형석기, 방추차, 기종의 유사성을 근거로 중국 길림-두만강 유역 잡곡농경 주민의 이주로 출현했다고 보는 것인데, 전자가 좀 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후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덧띠무늬토기가 잔존하기도 하지만, 겹아가리, 구멍무늬, 빗금무늬, 골아가리무늬의 조합 양상에 따라 다양한 토기문화가 전개된다.

겹아가리는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청동기시대 전기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확인된다. 대동강 유역의 팽이토기는 좁은 굽을 가지고 있어 팽이형을 띠고 빗금무늬는 몇 개 단위로 새기는 것이 특징이다.

청천강 유역에서도 겹아가리토기가 제작되는데, 팽이토기보다 바닥이 넓어 안정적이고, 빗금무늬가 등간격으로 새겨지는 등 금강 유역 가락식토기의 기원으로 이해되고 있다.

가락식토기는 납작 바닥의 깊은바리형으로, 겹아가리 전체, 하단 또는 몸통에 걸쳐 빗금무늬가 새겨지는 것이 특징으로, 늦은 시기에는 구멍무늬나 골아가리무늬가 부가되기도 하는데, 대전을 중심으로 한 금강 유역 일대에 집중 분포한다.

한편, 최근에는 가락식토기와 돌대문토기와 달리 겹아가리토기를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청천강 유역과 관련되는 반면, 후자는 요동 지역의 겹아가리토기와 관련되는 것으로 마성자계, 상마석계, 요동계 겹아가리로 명명되기도 한다.

금강 유역을 제외한 한반도 남부 일대에는 구멍무늬와 골아가리무늬가 조합된 역삼동식토기, 가락식토기와 역삼동식토기 요소가 조합된 흔암리식토기가 유행하였다.

역삼동식토기는 아가리 둘레에 구멍 무늬가 있는 것으로 두만강 유역의 무산 호곡, 회령 오동 유적 등 동북한 지역에서 출토되어 일찍이 기원지로 주목된 바 있다. 그러나 압록강 중상류에서도 구멍 무늬가 출토되고, 신석기시대 후기의 춘천 내평 유적, 인천 용유도 유적, 서산 대로리 유적에서 구멍 무늬가 출토되는 등 압록강 유역에서 기원하였거나, 한반도에서 자생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흔암리식토기는 가락식토기와 역삼동식토기의 문양 요소를 모두 계승한 것으로, 양자의 문화 접변으로 출현하는데, 대체로 역삼동식토기의 분포 범위와 상당 부분 겹쳐 있다.

청동기시대 전기의 다양한 토기문화의 시간성에 대하여, 가락식-흔암리식-역삼동식토기의 순서로 출현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고고학적 유물의 병존 양상은 이들 토기문화가 동시에 출현하여 접촉하며 전개되었음을 뒷받침해 준다.

중기의 민무늬토기

민무늬토기는 일찍이 가락식을 비롯한 전기와 점토대토기의 후기로 구분되었다가, 부여 송국리 유적이 발굴되면서 전기와 후기 사이의 중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송국리형토기와 송국리형 주거를 표지로 하는 송국리문화는 도작 농경을 비롯한 환호취락, 삼각형석도, 편인석부류와 같이 수도작(水稻作, 벼농사)에 적합한 문화상을 띤다.

송국리형토기는 아가리가 짧게 벌어지는 것으로 전형적인 송국리 유형은 충청도와 호남, 영남 서부에 집중하고, 그 밖의 서울 경기, 영서 지역에서는 전기의 역삼동식토기가 잔존하며, 동남 해안 지역에서는 검단리 유형이 전개된다.

송국리형토기의 형성 과정은 크게 외래 기원설과 자체 발생설이 있다. 전자는 송국리형토기가 도작 농경 등 완성된 형태로 출현하는 점을 근거로 하고, 후자는 전기의 민무늬토기에 적색마연(赤色磨硏)의 외반구연(外反口緣) 방식이 결합하여 출현한다고 본다.

그러나 자체 발생설에서 한반도 전 지역에서 송국리형토기가 출현할 수 있는데, 왜 충청 서해안에서 먼저 출현하는지, 외래 기원설에서 송국리형토기의 기원지가 어디인지 불분명하듯, 기원 문제는 아직 논의 중에 있다. 한편, 충남 서해안 지역에서는 새롭게 토기 표면을 두드리는 타날(打捺) 방식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송국리형토기는 토기 자체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은데, 대체로 구연이 짧게 직립하는 것에서 외반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송국리형토기는 다음의 덧띠토기[粘土帶土器]의 출현과 더불어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최근에 보령 진죽리, 관창리, 군산 도암리 등 곳곳에서 송국리형 주거에서 원형덧띠토기가 병존하는 등 송국리형토기가 지역에 따라 서기 전후까지 잔존한 것으로 이해된다.

송국리형토기가 출토되지 않는 동남 해안 지역의 검단리형토기는 깊은 바리형 토기 아가리에 구멍무늬, 낟알무늬 등이 새겨진 것으로 손잡이가 부착된 토기, 붉은간토기, 울산형주거지, 동북형 석도 등과 결합하여 오랜 기간 잔존한다. 그리고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 서북부 일대에서는 미송리형토기[弦文壺]가 유행한다. 평안북도 의주군 미송리 동굴 유적 상층 유물을 표지로 하는데, 청동도끼와 함께 출토되어 비파형동검과 관련이 깊다.

미송리형토기는 목부분 또는 몸통에 여러 줄의 선문이 새겨지는데, 몸통에 가로붙은 손잡이[橫橋狀 把手]가 붙어 있다. 미송리형토기는 청천강 유역의 겹아가리토기 및 대동강 유역의 팽이토기와 함께 출토되기도 한다. 미송리형토기는 점차 구경부가 길어지고, 손잡이가 돌기 모양으로 붙은 묵방리형토기로 변한다.

한편, 청동기시대 전기-중기에는 일상용 토기 외에도 붉은간토기가 성행하고, 적색 안료가 도포되지 않은 것도 마연토기의 범주에 포함된다. 적색 안료를 도포하는 행위는 두만강 유역에서 빈번하게 확인된다.

마연토기의 기종인 굽다리토기[臺附土器], 편구옹(扁口甕)대부토기, 채문토기(彩文土器), 목과 어깨 사이에 선이 그어져 있는 편평한 바닥의 긴 목항아리[頸肩間橫沈線文 平底長頸壺], 겹아가리완[二重口緣盌] 등은 압록강 유역을 비롯하여 중국 동북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어, 중국 동북 지역 및 연해주 일대 문화 요소들이 한반도로 유입되고 토착 민무늬토기문화 제작 기술과 융합되어 한반도 고유의 붉은간토기가 탄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기에는 플라스크형을 비롯하여 짧은 목항아리와 긴 목항아리가 유행하는데, 목부분이 내경하는 것이 특징이다.

후기의 민무늬토기

청동기시대 후기는 덧띠토기로 대표된다. 덧띠토기문화[粘土帶土器文化]를 초기 철기시대에 포함시키기거나 철기가 없는 단계까지는 청동기시대, 그 이후를 초기 철기시대로 나누기도 하지만, 토기의 제작 방식과 구성에서는 이전의 민무늬토기를 계승한다.

덧띠토기는 덧띠 단면이 둥근 것에서 삼각형인 것으로 변하는데, 양주 수석리, 보령 교성리 유적 등 생활 유적에서는 덧띠토기에 돌기가 부착되고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형토기[把手附壺形土器]가 병존한다. 무덤에서는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유적처럼 검은간 긴 목항아리[黑陶長頸壺]와 병존한다.

손잡이 달린 토기는 환상파수에서 조합우각형파수, 우각형파수, 봉상파수로 변하고, 검은간 긴 목항아리는 목이 길어지고, 굽다리토기[豆形土器]는 대각이 비어 있는 공심형과 차 있는 실심형으로 나뉘는데, 후자는 삼각형덧띠토기와 병존하기도 한다.

덧띠토기는 평양 남경 유적에서 출토되어 팽이토기에서 기원하였다고 제시된 바 있으나, 최근에는 덧띠토기와 세형동검이 병존하고, 심양 정가와자(鄭家窪子), 공주둔(公主屯) 후산(后山) 출토품과의 유사성을 근거로 연(燕) 장수 진개의 동진으로 고조선 유민이 한반도 서남 해안 일대로 이주하면서 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덧띠토기는 연구자에 따라 세형동검과 함께 서기전 4세기에 출현한다고 보거나, AMS 연대측정을 통해 서기전 6~5세기경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원형덧띠에 이어 출현하는 삼각형덧띠토기는 삼천포시 늑도유적과 해남 군곡리유적을 표지로 한다. 원형에서 자체적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서북한의 명사리식토기문화의 파급으로 형성되었거나, 중국 동북 지역 윤가촌 하층 2기문화에서 기원하거나 요북 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삼각형덧띠토기는 구연이 꺾여 벌어지고 표면에 목판으로 긁어 나이테 흔[木理] 흔적이 나타나는데, 뚜껑, 시루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민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가 끝나고 청동기시대가 시작되는 때인 서기전 1500년경[중국 동북지역의 경우 서기전 2000년경]에 한반도 일대에서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민무늬토기의 출현 이후 문양의 차이는 있지만, 토기의 기종 구성, 제작 방식에서 별 차이가 없다가 서기전 2세기 중엽 무렵부터 변화가 발생하였다.

점토대토기에 이어 출현하는 와질(瓦質)토기는 민무늬토기와 달리, 정선된 바탕흙, 회전판 성형과 정형, 타날기법의 활용, 환원염(還元焰) 소성 등의 새로운 기술로 탄생하였다. 그 시점은 연구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서기전 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서북한 지역에서는 서기전 2세기 중엽경에 이러한 변화가 나타났으며, 요동반도 일대로 확대시키면 서기전 3세기 초부터 새로운 변화가 감지된다. 따라서 민무늬토기는 한반도에서 서기전 2세기 중엽∽서기전 1세기에 걸쳐 새로운 기술 체계로 제작된 토기로 대체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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