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

압록강
압록강
자연지리
지명
우리나라와 중국의 동북 지방과 국경을 형성하며 황해로 유입되는 강.
이칭
이칭
패수(浿水), 염난수(鹽難水), 마자수(馬訾水), 청수(靑水), 엄리대수(奄利大水), 청하(靑河), 아리나례강(阿利那禮江), 얄루장, 얄루, Ya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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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우리나라와 중국의 동북 지방과 국경을 형성하며 황해로 유입되는 강.
개설

백두산 천지 부근에서 발원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 : 滿洲)과의 국경을 이루는 국제 하천으로, 혜산 · 중강진 · 만포 · 신의주 등을 거쳐 용암포의 초하류(稍下流)에서 황해로 흘러든다. 압록강은 허천강 · 장진강 · 부전강 · 자성강 · 독로강 · 충만강 · 삼교천을 비롯하여 100㎞를 넘는 여러 하천들과 수많은 지류로 형성되어 있다.

이 강은 직선거리로는 400㎞정도이나 상류 쪽에서 심한 곡류를 이루므로 실제 강 길이는 직선거리의 2배에 가깝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강으로, 강의 길이는 803.3㎞이고, 유역 면적은 3만 1,226㎢이며, 가항 거리는 698㎞이다.

압록강의 명칭 유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압록강의 물빛이 오리머리빛과 같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고 하여 압록(鴨綠)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이나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패수(浿水) · 염난수(鹽難水) · 마자수(馬訾水) 또는 청수(靑水) 등의 이름으로도 나온다. 부여에서는 엄리대수(奄利大水), 고구려에서는 청하(靑河)라고도 불리었다. 중국에서는 황하(黃河), 양자강(揚子江)과 더불어 천하의 삼대수(三大水)라고 일컬었다.

그 외 아리나례강(阿利那禮江)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아마도 아리가 ‘태양’의 신령성(神靈性)을 나타내는 우리 고어에서 유래된 말일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은 압록강을 ‘얄루장’이라 부르고, 영어로는 ‘얄루(Yalu)’라 표기한다.

압록강 유역의 자연환경

압록강 유역의 지질과 지형

압록강은 중생대의 지각 변동으로 형성된 압록강 단층대를 따라 흐른다. 유역의 지질은 크게 네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상류 연안에 해당하는 함경남도의 신갈파진(新乫坡鎭) 부근까지의 지역은 중생대의 대동계층의 기반 위에 결정편암, 반려암이 포함된 화성암이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신생대에 백두산에서 대규모로 분출된 현무암이 그 위를 덮어 오늘날의 개마고원을 형성하였다.

개마고원에는 송화강(松花江)의 상류에 해당하는 장진강(長津江) · 허천강(虛川江)을 비롯한 여러 갈래의 강줄기가 북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장진 · 허천 두 강이 북류하다가 압록강으로 흘러, 부근의 유로는 모두 압록강 본류의 유향과 반대 쪽인 북동 방향이다. 또한 압록강의 경사도를 보면 이 두 강이 압록강과 합류하는 점은 장진강 쪽이 낮다. 그러나 곧 허천강의 하상보다 높아져서 거의 평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압록강의 본류가 허천강구 부근에서 갑자기 하상이 높아져 경사가 급변하는 것으로 보아, 허천 · 장진 두 강에 비하여 압록강이 후기에 형성되어 아직 하각침식(下刻浸蝕)이 진전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제3기 후기에 장진강 · 허천강은 동북동으로 흘러내리다가 동북의 영고탑(寧古塔)이 있는 분지로 흐르고, 다시 목단강(牧丹江)을 피하여 우쑤리강[烏蘇里江]의 서지목릉강(西支穆稜江)으로 흘러들었다고 여겨진다. 그 뒤 압록강은 두부침식(頭部侵蝕)을 발달시키고, 강의 길이를 증가시킴에 따라 허천강과 장진강을 탈취함으로써 오늘날처럼 이들 강이 압록강으로 방향을 바꾸어 유입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신갈파진에서 만포에 이르는 압록강의 중류 연안 지역은 중강진을 정점으로 하여 압록강이 심한 굴곡을 하는 자성 · 후창 두 군의 북부지역으로 안산암 · 반려암 · 결정 편마암 등이 섞여 있는 복잡한 지층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압록강 유역의 간헐적인 융기에 의하여 중위평탄면(中位平坦面)이 발달하였는데, 이 중에서 오수덕(烏首德) 고개는 대륙의 광활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하류 지역에는 고생대 캄브리아기에서 오르도비스기에 걸쳐 분출한 화강 편마암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압록강 가까이에는 강남산맥이 뻗어 있는데, 이 산맥을 횡단하여 북서북 방향으로 단층선(斷層線)이 발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생긴 저지로 태천 · 벽동에서 운산으로, 초산에서 희천에 이르는 단층선은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압록강의 하류는 퇴적층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하구에는 넓은 범람원과 삼각주가 발달되어 있고, 넓은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압록강은 백두산의 최고봉인 병사봉(兵使峰)의 남동 약 8㎞부근에서 발원하여 작은 계류를 형성하면서 흐르다가 보천보(普天堡) 부근에서 높은 하안단구를 이루고, 가림천(佳林川) · 오시천(五是川) 등을 합하여 혜산을 지나면서 서쪽으로 유로를 바꾼다. 서쪽으로 흐르면서 수력발전으로 유명한 허천강 · 장진강을 비롯하여 평안북도에서 후주천(厚州川)을 합한 다음 중강진에 이른다.

상류 지역은 강폭이 비교적 좁고 유속이 빠르나, 중강진 부근에서 남서쪽으로 유로를 바꾸면서부터는 강물의 흐름이 갑자기 느려지고, 급한 여울도 많이 나타난다. 중강진에서 하류쪽으로 흘러내리면서 자성강(慈城江), 독로강(禿魯江), 위원강(渭原江), 충만강(忠滿江), 삼교천(三橋川) 등과 중국 쪽에서 훈강(渾江)을 합하여 황해로 흘러든다.

압록강은 강남산맥과 중국의 장백산맥(長白山脈) 사이를 흘러서 유역에는 급한 침식애(侵蝕崖)가 발달되었고, 대규모의 감입곡류(嵌入曲流)가 많은 강으로 유명하다. 특히 신의주에서 200㎞ 가량 상류에 해당하는 위원군 서태면의 강 건너에 있는 관통구릉(貫通丘陵 : 곡류가 절단될 때 보호사면 쪽에 남은 구릉)인 관문납자(關門拉子)와 그 상류에 있는 협착산각(狹窄山脚)인 라오후차오[老虎哨]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함경남도의 신갈파진과 혜산과의 사이에는 모식적인 감입곡류에 의한 관통구릉이 여러 개 남아 있다. 이렇듯 향사곡에서 급한 침식곡을 이루며 흐르므로 연안에는 평지가 발달하지 못하여 경지 면적이 극히 좁다. 그러나 공격사면(攻擊斜面)에는 높은 절벽이 솟아 있어서 하안에 도로마저 통하지 못하는 곳이 많다. 그러나 곡류를 하는 안쪽인 보호 사면(保護斜面) 쪽에는 군데군데 범람원이 전개되어 취락이 형성되어 있으며 고구려의 왕도가 건설되기도 하였다. 의주 이하의 하류 연안에는 비교적 넓은 의주평야가 펼쳐져서 예로부터 이 지역의 곡창 지대가 되었다. 하구에는 삼각주가 발달하였는데, 그 중에는 위화도(威化島)와 같은 범람원을 비롯하여 신우평(信隅坪) · 영문강(迎門崗) 등의 하중도들이 있다.

압록강 유역의 기후

압록강 유역은 우리나라의 북단을 차지하고 있으며, 바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을 포함해 우리나라에서 기온의 차가 가장 큰 곳이다. 특히 중강진이 있는 중류 연안 지역은 북쪽으로 크게 굴곡하여 만주 지방으로 돌출하고 있어서 대륙의 영향을 크게 받아 심한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중강진의 연평균기온은 3.8℃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다. 7월 평균기온은 22.7℃이고, 1월 평균기온은 -20.8℃로서 기온의 연교차가 43.5℃나 되는 극심한 대륙성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1933년 1월 12일에는 -43.6℃까지 내려가 우리나라의 한극(寒極)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곳의 초빙일(初氷日)은 9월 28일, 종빙일(終氷日)은 5월 10일이어서 대체로 압록강 연안의 결빙기간(結氷期間)은 5개월이 넘을 정도이다.

유역의 강수량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적은 편인데, 연평균 강수량은 500~600㎜밖에 되지 않는다. 압록강 유역은 우리나라에서 증발량이 제일 적고 습한지대로 되어 있다. 한 해 동안 하루 최대 증발량은 강계에서 10.0㎜, 중강에서 10.7㎜, 만포에서 11.6㎜이다. 압록강이 어는 시기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데, 대체로 상류로 올라갈수록 얼음이 어는 기간이 훨씬 길어진다. 수풍호가 건설된 이후부터는 하류에서 결빙 기간이 훨씬 줄어들었다.

이와 같이 개마고원 일대는 대동강 하구지역, 낙동강 연안의 대구분지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소우 지역을 이룬다.

압록강 유역의 생태

압록강 유역 일대는 우리나라 산림자원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압록강 유역의 기온은 겨울철에 -20∼-30℃ 정도로 내려가나 대륙성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철에는 비교적 고온이 되어 냉대림이 무성하다. 이 지역에는 전나무 · 분비나무 · 이깔나무 · 잣나무 · 낙엽송 · 향나무 등의 침엽수를 비롯하여 떡갈나무 · 피나무 · 박달나무 · 가래나무 · 자작나무 · 백양나무 등의 활엽수가 밀림을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강 연안은 우리나라 특산인 산삼의 명산지였으며, 산삼은 중국 · 일본 등에 대한 중요한 무역품이었다. 압록강 연안 지역을 포함한 북한지방은 시베리아 동물구에 속하여 동물 분포는 대체로 중국의 동북 지방과 비슷한 점이 많다. 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야수류(野獸類) 중 대표적인 것으로 멧돼지 · 노루 · 큰곰 · 표범 · 승냥이 · 이리 · 여우 · 수달 · 멧토끼 등이 있다. 또한 혜산군 보천보 부근에는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목도리담비잘이 서식하고 있다. 야수류나 금수류에는 특수한 것이 없고 전국 각지의 분포가 거의 같다.

압록강은 양어장 공업용수와 음료수 그리고 운수로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압록강의 본류와 지류에는 잉어, 붕어, 초어, 누치, 빙어, 열목어, 뱀장어, 가물치, 숭어, 농어, 웅어, 은어, 야레 등 107종의 물고기들이 서식한다. 강의 어패류 중에서 특이한 것은 가물치와 청사리 등이다. 특히 가물치는 보약재로 중국으로 수출되었고, 청사리는 냉수성 담수어로서 강 중류로 흘러드는 후창강(厚昌江)에서만 볼 수 있다.

압록강 유역의 역사와 문화유적

압록강 유역의 선사시대 유물 · 유적들은 강 본류보다는 지류에 산재해 있다. 그러나 아직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적은 없으며, 신석기시대의 주거지와 토기 · 석기 · 골각기 등의 유물이 중류의 중강군 토성리, 하류의 의주군 미송리, 용천군 용연리 · 신암리 · 쌍학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중강군 토성리, 시중군 심귀리 · 노남리, 강계시 공귀동, 벽동군 송련리, 의주군 의송리, 용천군 신암리 등에서 거주지가 발굴되었으며, 이들 유적에서는 청동기를 비롯하여 토기와 반월도(半月刀) · 돌도끼 · 방추차(紡錘車) · 석검 · 돌화살촉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강계시의 풍룡동과 공귀동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석관묘가 발견되었다. 다만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세형동검(細形銅劍)은 아직 출토된 예가 없다.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으로 시중군 노남리에서 야철지(冶鐵址)와 주거지, 심귀리에서는 분묘가 발견되었으며, 이들 유적에서는 철기 · 토기를 비롯하여 명도전(明刀錢) · 오수전 (五銖錢) 등 화폐가 출토되었다. 이 밖에 중강군 토성리, 자성군 서해리, 위원군 용연동 등에서도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삼국시대에 압록강은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특히 4세기 이전에는 고구려의 수도가 이곳에 위치하였으므로 고분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과 유적들이 강 주위에 분포해 있다. 강을 중심으로 남북을 구분하면, 강 남쪽보다는 강 북쪽의 만주 지역에 더 많은 편이다. 먼저 강 남쪽 연변의 강계군 시중면을 중심으로 한 외귀면 · 곡하면 일대에서 고구려 초기의 집 자리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서는 당시 구들의 형태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시중군 · 만포시 · 자성군 · 중강군 · 후창군 · 위원군 · 초산군 등에는 4세기 이전 고구려의 적석총(積石塚)들이 밀집되어 있는데, 많은 곳은 180여 기(基), 적은 곳은 4, 5기 정도가 있다. 강 북쪽의 만주 지방에는 고구려의 수도가 위치하였던 환인(桓仁) 지방과 집안(集安) 일대에 고구려 초기의 유적들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로 알려져 있는 졸본(卒本)은 환인 지방의 오녀산(五女山) 부근으로 비정된다. 오녀산에는 남북 길이 약 1㎞, 동서 너비 약 300m 크기의 고구려 산성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넓적한 돌로 쌓았으며 북쪽은 가파른 벼랑에 의지하여 성벽을 이루고 있는데, 축성법이나 사각추의 성돌 및 자연 지세의 이용 상태, 성안의 유물들을 통하여 고구려 유적임이 확인된다. 그리고 오녀산 부근에는 산의 경사지나 산기슭에 고구려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다.

환인 지방에는 총 750기의 고분들이 남북으로 길이 1㎞의 군(群)을 형성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적석총이고, 그 밖에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와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 34기가 있다. 이 가운데 적석총은 3세기 이전의 것으로, 수혈식 석곽묘는 3세기 중엽 이후의 것으로 각각 추정되며, 4세기 이후의 고분은 이 지역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서기 3년(유리왕 22)에 고구려가 수도를 국내(國內)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이 국내성의 위치가 오늘날 만주의 길림성(吉林省) 지안현에 해당한다. 따라서 지안 일대에는 국내 성지를 비롯하여 많은 고구려 고분이 남아 있다. 국내성은 총면적 42만㎡의 방추형 석전(石殿)으로 높이가 5∼6m, 성벽 밑 부분 너비는 9∼10m, 성안의 벽 높이는 3∼5m 정도이다.

『집안현지(集安縣志)』에 의하면, 1905년(광무 9) 당시까지만 해도 옹성을 갖춘 문이 동벽 남쪽에 1개, 서쪽에 2개가 있었으며, 남벽 동쪽과 북벽에는 문을 막은 흔적이 1개씩 있었다고 한다. 성의 네 귀퉁이에는 누각의 흔적이 보이고, 일정한 거리마다 치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현존하는 치는 동벽 3개, 서벽 1개, 남벽 2개, 북벽 2개 등 모두 7개이다.

성밖에는 해자(垓字 : 성 밖으로 둘러 판 못)의 흔적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지안현의 통구(通溝)에는 고구려의 고분들이 특히 많이 밀집되어 있다. 광개토왕의 능으로 알려져 있는 장군총(將軍塚)도 그 가운데 하나이며, 또한 모두루총(牟頭婁塚) · 각저총(角抵塚) · 무용총(舞踊塚) · 사신묘(四神墓) · 산련화총(散蓮花塚) · 구갑총(龜甲塚) · 미인총(美人塚) 등 벽화고분도 다수 발굴되었다.

국내성지로부터 북쪽으로 2.5㎞ 떨어진 지점에는 해발 678m의 환도산(丸都山)이 있는데, 여기가 고구려의 환도성이 있던 곳이다. 성벽은 화강암으로 쌓았고, 전체 길이는 동벽 1,716m, 서벽 2,440m, 남벽 1,786m, 북벽 1,009m이다. 성문 자리는 동벽과 북벽에 각 2개, 남벽에 1개가 있고, 성 안에는 3개의 건축 유지와 연못 1개, 고분 37기가 있다.

이 고분들은 모두 고구려의 것으로 토분이 1기이고 그 밖에는 모두 석분으로, 적석묘(積石墓) · 방단적석묘(方壇積石墓) · 방단계단적석묘(方壇階段積石墓) 등의 유형이 있다.

지안 일대는 고구려 건국 이후로 줄곧 고구려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강 유역이 대부분 발해의 영토가 되었으며, 하류의 일부는 당나라에 속하였다. 특히 중류의 임강(臨江)에는 발해의 5경(五京) 가운데 하나인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가 설치되어 지방 제도의 중심이 되었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중류 지역에서 발해 유민들에 의해 정안국(定安國)이 세워졌으나, 하류에서는 여진족이 산거하였다. 그 뒤 거란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986년(고려, 성종 5)에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강 하류의 여진족을 경략하여, 991년(성종 10)에 내원성(來遠城)을 쌓음으로써 중 · 하류 지역이 모두 거란의 영역이 되었다.

993년(성종 12)에는 거란이 고려를 침입해 왔으나, 고려는 서희(徐熙)의 외교에 힘입어 강동 6주(江東六州)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의 북쪽 경계가 처음으로 압록강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의주(義州)에 압록강도진(鴨綠江渡鎭)이 설치되고 구당사(勾當使)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강 유역의 대부분은 여전히 거란이 차지하였고, 고려가 차지한 곳은 의주 등 최하류 지역이었다. 그 뒤 거란의 침입이 계속될 때마다 의주 일대에는 많은 방어진(防禦鎭)들이 설치되었는데, 흥화진(興化鎭)을 비롯하여 위원진(威遠鎭) · 정융진(定戎鎭) · 영덕진(寧德鎭) · 정주진(靜州鎭) · 영삭진(寧朔鎭) 등이 그것이다. 또한 현종 때에는 강감찬(姜邯贊)이 이곳에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쌓았음은 물론 이곳을 기점으로 1033년(고려, 덕종 2)부터 1044년(정종 10)까지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고려 후기에도 강 유역의 영속 관계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다만 중 · 상류지역이 북중국에서의 왕조 교체에 따라 거란 · 여진 · 몽고에 차례로 속하였다. 1270년(원종 11)에는 몽고가 서경(西京 : 지금의 平壤)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고 자비령(慈悲嶺) 이북을 직접 다스리면서 의주 일대도 역시 이에 속하였으나, 1290년(충렬왕 16)에 동녕부를 만주의 개원(開原)으로 옮김으로써 다시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1369년(공민왕 18)에는 의주 · 강계 · 이성(泥城 : 지금의 昌城) 등에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여 중류 지역에까지 진출하였으며, 다음해에는 강을 넘어 개원의 동녕부를 공략하였다. 1388년(우왕 14)에는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중단하고 의주 대안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새 왕조를 세웠다.

조선 초기부터 적극적인 북진정책이 추진되어 태종 때 갑산(甲山) · 여연(閭延) · 이산(理山) 등지의 야인(野人 : 女眞族)을 물리치고 압록강 이남 지역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야인들의 침략이 계속되었으므로 세종 때에 다시 이들을 토벌하고 여연 · 자성(慈城) · 무창(茂昌) · 우예(虞芮)의 4군(郡)을 설치하여 압록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후 압록강은 관방진지(關防陣地)로서 강 연안에 성(城) · 진(鎭) · 보(堡) · 봉수대(烽燧臺)와 누각(樓閣) 등이 곳곳에 세워졌다. 먼저 최상류의 허천강 유역에 있는 갑산에는 인차외진(仁遮外鎭)이 설치되었는데, 이곳은 대안의 만주 장백현(長白縣)과 국경상에서 야기되는 여러 문제들을 조절, 관할하는 동시에 국경 수비의 요새지로서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또한 후창강과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에는 1674년(현종 15)에 처음으로 첨사(僉使)를 두고 후주성(厚州城)을 쌓았는데, 지금도 성지가 남아 있다. 자성에는 여연면과 장토면(長土面)에 세종 때 4군이 설치되었던 여연성지와 우예성지가 있다. 이 성의 구축은 당시 동가강(佟佳江;渾江) 유역의 야인들이 여연부의 서남쪽을 침범할 것에 대비하여 축조된 것이다. 압록강의 지류인 독로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강계읍성도 1436년(세종 18)에 세워진 것으로, 1739년(영조 15)에 한 차례 개축되었다.

성 안에는 인풍루(仁風樓)와 망미정(望美亭)이 있다. 강계와 압록강변을 잇는 만포진에는 병마첨절제사영(兵馬僉節制使營)과 군창(軍倉) 그리고 행성(行城) 등이 있으며, 만포읍 동쪽의 압록강 기슭 절벽 위에는 세검정(洗劍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세검정은 인조 때에 박남여(朴南與)가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오는 청군을 물리치고 칼을 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만포읍의 포상동(浦上洞)에 있는 고산진(高山鎭)은 세조 때에 남이(南怡)가 여진족을 무찌른 곳이다.

압록강의 지류인 위원강 유역에는 위원고성(渭原古城)이 있는데, 이 성은 1443년(세종 25)에 위원군을 설치하면서 여진족을 방비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위원강 상류에는 자연 암벽과 산등성이에 의지하여 쌓은 옛 성이 있는데, 이는 1743년(영조 19)에 압록강의 홍수와 외침에 대비하여 위원읍을 이곳에 옮기면서 쌓은 것이다. 성 안에는 위원읍이축성비(渭原邑移築城碑)가 있어 변방을 지켜낸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좀 더 하류 쪽의 자산과 삭주에는 자모산성(慈母山城)과 대삭주산성(大朔州山城)이 있으며, 성 안에는 군영지(軍營址)와 군창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삭주의 군창은 인근의 박천 · 가산 · 태천 등지에서 관조세(官租稅)를 거두어들이던 곳이다. 삭주성에는 2개의 행성과 구령보(九寧堡)가 딸려 있으며, 주변의 진(鎭)으로는 천마진(天摩鎭)과 구령진이 있다. 구령진은 의주 청수진(靑水鎭)과 강외 노상탄(老上灘)의 통로 및 강외 황발리(荒發里) 아래 전량동(田兩洞)의 통로를 방어하는 요지이다.

벽동에는 읍성이 있고 주위에 3개의 행성과 목책(木柵) · 보 · 봉수지(烽燧址) 등이 있다. 압록강의 최하류인 의주에는 돌로 쌓은 읍성이 있고 사면에 모두 문이 있으며, 문마다 옹성이 갖추어져 있다. 또한, 의주읍의 객관(客館) 북쪽에는 통군정(統軍亭)이 있어 사방을 관찰하게 되어 있으며, 통군정 봉수대는 주변 20여 개의 봉수대와 연결되어 있다.

읍성 남쪽의 압록강변에는 의순관(義順館)이 있는데,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곳으로 본래 망화루(望華樓)라 하던 것을 세조 때에 ‘누’를 없애고 ‘관’이라 하였다. 의주에도 역시 군창이 있어 평안도 내의 철산 · 곽산 · 정주 · 선천 · 용천 등지에서 관조세를 거두어들였다. 또한, 의주 북쪽의 구룡연(九龍淵) 위에는 압록강사(鴨綠江祠)가 있다. 압록강이 장단(長湍)의 덕진(德津), 그리고 평양강(平壤江)과 함께 서쪽 지방의 큰 강이므로 사전(祠典)의 중사(中祠)에 실리고, 이곳에서 매년 봄과 가을마다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한편 예로부터 의주는 중국과의 교역의 중심지로서 매우 중요시되었으며, 1593년(선조 26)에는 유성룡(柳成龍)의 건의에 따라 의주 대안의 중강(中江)에 개시(開市)하고 명나라와 무역을 행하였다.

이 때의 중강 개시는 임진왜란 중의 기황(飢荒) 때문에 요동의 미곡을 들여오기 위해서였다. 1601년(선조 34)에 한때 중단되었으나 다음 해에 재개되었으며,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중단되었다가 청나라의 건국과 함께 1646년(인조 24)에 재개되어 대청 무역이 행해지게 되었다.

한말에 이르러서는 상류의 원시림이 서구 열강들에게 침탈되어, 1896년 아관파천 직후에 러시아가 삼림채벌권을 차지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강 유역의 원시림을 마구 벌채하여 뗏목을 만들어 수송함으로써 삼림이 황폐해졌다. 1911년에는 신의주와 중국의 안둥[安東]을 잇는 길이 944m의 철교가 준공되었는데, 철로 좌우에는 너비 2.6m의 인도가 있으며, 선박의 통행을 위하여 가동식(可動式)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1934년부터 교량 보존을 위하여 개폐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1937년부터는 삭주군 수풍리에 동양 최대 규모의 댐과 수력발전소가 착공되어 1944년에 완성되었다. 이 밖에 강 연변에는 일제 강점기 때의 우리나라 독립군의 항쟁지가 곳곳에 있다.

문학예술에 나타난 압록강

압록강은 신화시대로부터 그 물이 상징하는 의미와 함께 중요한 사유의 대상이 되었다. 『삼국유사』 「고구려조」에는 자칭 천제(天帝)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가 물의 신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꾀어내어 압록강가에서 사통한다는 기록이 있다. 해모수와 유화는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朱蒙)의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에 해당된다. 이때의 압록강은 고대 신화 세계에서의 물이 상징하는 바의 생산과 풍요, 그리고 모태(母胎)로의 회귀라는 원초적인 의미를 지닌다.

고구려 건국 신화와 관련되어 압록강이 신화적 상징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문헌 기록으로는 『삼국유사』 외에도 『삼국사기』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제왕운기(帝王韻紀)』 · 『신증동국여지승람』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등이 있으며, 중국의 역사 기록물에도 그 면모가 남아 있다. 특히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성 북쪽에 청하가 있으니, 하백의 세 딸이 아름다웠다. 압록강 물결 헤치고 나와, 웅심 물가에서 놀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와 같이 신화적 사유의 대상이던 압록강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시적 정서를 표출하는 배경이나 대상으로서 술회된다.

압록강은 특히 한시로 많이 읊어졌는데, 이제현(李齊賢)의 「조정으로 돌아가는 이한림을 보내며[送李翰林還朝]」, 권근(權近)의 「압록강을 건너다[渡鴨綠]」 · 「압록강에 배를 띄우고서[鴨綠江泛舟]」 · 「압록강을 지나면서[過鴨綠江]」, 강희맹(姜希孟)의 「압록강을 지나면서[過鴨綠江]」, 성중엄(成重淹)의 「성 마루에 올라 압록강을 바라본다[登城頭望鴨綠江]」 등이 있다.

먼저 이제현의 「송이한림환조」에는 “압록강 푸른 버들은 이별을 아끼지만 금원에 핀 꽃들은 좋은 놀이를 기다리리 술잔 들며 언제 다시 회포를 논해볼까 백발인 내 신세를 산수간에 부치려네[鴨江柳暗牽離思 鼇禁花開待勝遊 樽酒論懷更何日 白頭身事付蒼洲]”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시에서 압록강은 이별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시는 조정으로 돌아가는 벗을 배웅하면서 읊은 시이므로, 강 건너로 보낼 때의 애절한 이별의 정서보다는 강가에 피어 있는 꽃들과 버들의 신선함에 대비되는 자신의 늙음에 대한 울적한 정서가 지배적이다. 이때의 압록강은 일반적으로 강이 환기하는 이미지인 ‘늘 푸르름’, ‘흘러감’, ‘뱃놀이의 풍치’ 등의 범주에 속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압록강을 다루고 있는 다른 시들로는 권근의 한시 「압록강범주」와 강희맹의 「과압록강」, 성중엄의 「등성두망압록강」 등이 있다.

「과압록강」의 “학 나는 들 저문 산은 푸르러 눈썹 같고 압록강 가을 물은 쪽빛보다 더 진하네[鶴野晩山靑似黛 鴨江秋水碧於藍].”라는 구절은 자연 환경으로서의 강이 환기하는 서정에 넘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다.

한편, 문학 작품 속에서 압록강이 환기하는 가장 주된 이미지는 역시 변방 혹은 국경으로서의 의미이다. 먼저 한시로는 권근의 「도압록」을 들 수 있다. 중국으로 사신 가는 신하가 압록강에 이르러, 또 강을 건너면서 느끼는 회포를 읊은 작품이다. 작품 첫머리에서 “쓸쓸하다 변방 고을 나무나무 고목인데 한 가닥 긴 강물 요양성 건너로세[塞邑蕭條樹老蒼 長江一帶隔遼陽].”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외진 변방의 쓸쓸함과 국경 근처의 분위기를 묘사한 다음, 그 국경을 건너기 위하여 배를 탄 상황 묘사를 “파도에 맡기어라 작은 배 흔들리고 반가워라 하늘의 해 외딴 곳을 비추누나[任見波濤掀小艇 欣瞻天日照遐荒].”라고 하여 매우 사실적이고 실감나게 읊고 있다.

시조로는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과 『진본청구영언(珍本靑丘永言)』에 실려 있는 홍서봉(洪瑞鳳)과 장현(張炫)의 작품을 들 수 있다. 병자호란으로 효종이 인질 수난을 당할 때에 그를 따라 수행한 홍서봉과 이들을 배웅한 장현의 처절하고도 아픈 이별의 정한이 강 풍경과 함께 애절하게 노래하였다.

홍서봉의 작품을 보면 “이별하든 날에 피눈물이 난지만지, 압록강 내린 물이 프른 빗치 전혀업네. 배 우희 허여셴 사공이 쳐음본다 하더라.”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별’과 ‘피눈물’, 그리고 ‘프른 빗치 젼혀업는’ 강물의 애잔함을 ‘허여셴 사공’의 ‘쳐음 본’ 눈을 통하여 간절한 정서로 노래하였다.

장현도 “압록강 해진 날에 에엿분 우리님이, 연운만리를 어듸라고 가시는고 봄풀이 푸르거든 즉시 도라오소셔.”라고 읊었다. 이는 보내는 안타까운 심정을 ‘해진 날’의 쓸쓸한 분위기와 멀고 먼 중국 땅에의 인질 수난이 하루 빨리 돌이켜지길 기원하는 마음을 묶어, ‘봄풀’이 돋는 이듬해엔 ‘즉시 도라올’ 것을 애절하게 노래하였다. 이 작품들을 통해 본 압록강은 어버이 나라를 떠나는 마지막 길목이라는 상징적 의미의 배경 아래, 그 이별의 모질고 고통에 찬 순간을 장식하는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압록강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중국과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문학작품 속에서도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보면, 그 첫 편이 「도강록(渡江錄)」이다. 이 작품은 압록강을 건너 요양 땅에 이르기까지의 15일 동안의 행적을 기록한 기행수필이다. 박지원은 여기에서 압록강의 명칭과 유래를 비롯하여 그 발원지와 장마 뒤에 강의 모습을 박진감 넘치는 표현으로 묘사하였고, 강 주위의 풍치와 자신의 느낌을 세밀한 필치로 구사하였다.

실제로 국가 사이의 행정적 · 정신적 구분의 의미를 지녔던 압록강을 건너는 데 따르는 심리적 기대감과 건너는 과정에서의 강물 묘사 등이 매우 탁월한 비유와 감각적 표현으로 세밀하게 그렸다. 여기에서의 압록강은 대륙과의 경계를 의미하여 우리 민족과 이민족을 지리적으로 구별해줄 뿐만 아니라, 정신적 지주로서의 상징적 의미도 갖는다. 당대 실학적 사상 배경 속에서 태동된 주체적 사고의 일면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압록강은 눈물의 강이 되었다.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부모를 떠나 만주로 북간도로 쫓겨가면서 마지막 관문이 된 압록강은 여러 문학작품들의 소재가 된 것이다. 김형원(金炯元)의 「압록강반에서」(1933년)를 보면 “개화 후 이 강 건너 드난 이 몇만 명가. 그들이 뿌린 눈물 네 품에 고였으니. 오리강 너 혼자서 속사정 알지 않니. 내 사랑 내 사랑 오리강 내 사랑.”이라고 하여 압록강에 어린 우리 민중의 한을 표현하였다. 유도순(劉道順)의 「압록강 뱃사공」(1935년)에는 뱃사공을 시적 화자로 한 배따라기 형식으로 압록강의 물결을 ‘슬픔’과 등식화하였다. 또한 압록강 연변의 산정마다 깎아 붙인 화전민들의 삶을 그린 시도 있다. 이찬(李燦)의 「북방도(北方圖)」(1940년)에는 화전민촌의 한 ‘시악시’의 풀 길 없는 하소연을 압록강에 띄워 보내는 구절이 있다.

광복 후, 중국땅 신경(新京)에 거주하던 피난민이 광복 직후 귀향하는 기차 속에서 겪은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이 김만선(金萬善)의 「압록강」(1946년)이다. “제길헐, 기왕 자살을 하려거든 압록강 추렁추렁하고 깊숙한 물 속에나 빠질 게지(중략) 기껏 여기까지 와서 모래밭으로 떨어져 만주 떼거지 같은 까마귀떼의 밥이 된담!” 등의 독백에서 조국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과 함께 압록강이 조국과 등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한편 1946년 독일에서는 이미륵(李彌勒)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독일어로 출판되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황해도의 양반 가문 출신인 작가가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대륙을 가로질러 독일에서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민족적 정서를 바탕으로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은 1인칭으로 된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인종이나 민족의 차별이 없이 인생 그 자체의 최고의 가치는 정직함과 선량함이라는 것’이라고 평가되거나 “그는 이방인인데도 우리와 외계와의 이해관계에 있어서는 자기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것을 깊이 파고들어가 실천해 나가는 데에 있다.”하는 등 개인적 경험이 예술적 차원에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격찬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의 압록강은 우리의 정신적 고향이며 지주로서, 근원의 강, 그 가슴속에 항상 흐르고 있는 어버이 나라에 대한 향수와 정신적 발원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압록강은 문학작품 속에서 신화적 의미를 지닌 상징적 배경으로, 국경이 자아내는 외지고 쓸쓸한 정조와 함께 순수한 자연 경관으로, 국경을 건너야 하는 이들의 쓰라린 이별과 시대적 수난의 배경으로, 마음의 고향을 의미하는 뿌리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요컨대, 압록강은 우리의 시조가 탄생한 신화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민족의 심성에 비추어진 민족의 강이라고 할 수 있다.

압록강의 이용

수자원

압록강은 우리나라에서 포장수력자원이 가장 큰 강이다. 1920년대 이후 강의 지류와 본류 여러 곳에 대규모의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 1929년에 부전강발전소가 건설되었는데, 제1발전소는 유효낙차가 707m, 발전시설용량은 14만 4000㎾로 당시 규모에 있어서 동양 제일을 자랑하였다. 제2발전소는 4만 6000㎾, 제3· 제4발전소가 각각 2만㎾, 1만 3000㎾로서 총 발전시설은 22만㎾에 달하였다. 이곳에서 발전된 전력은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에 송전되고, 일부는 성진 · 청진 등에도 송전되었다. 이 발전소는 함경산맥의 지형을 이용한 유역변경식(流域變更式) 발전으로 유명하다. 함경산맥은 개마고원의 남쪽 경계를 이루면서 동해안에 접근해 있어서 동해 사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압록강 사면은 느린 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부전강에 댐을 쌓고, 여기에 고인 물을 함경산맥 밑으로 뚫은 도수로를 통해 동해 사면으로 떨어뜨려 그곳 사면에서 발전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부전강의 서쪽을 흐르는 장진강에도 같은 유역변경식발전소인 장진강발전소가 있다.

장진강 상류인 장진군 상남면 갈전리에 주위가 120㎞나 되는 제1장진호를 이룬 댐을 구축하고, 24㎞의 터널로 함경산맥의 황초령(黃草嶺) 허리를 뚫은 다음 동해 사면을 흐르는 흑림강(黑林江)으로 낙하시켜 발전을 한다. 장진강 제1발전소는 유효낙차가 407m이며, 발전시설용량은 14만 4000㎾나 되고, 제2발전소는 10만㎾이며, 제3· 제4발전소로 이어져서 총 발전시설용량은 33만 4000㎾에 이른다. 장진강발전소는 1931년에 준공되었는데 이곳의 전력은 부전강발전소의 전력과 함께 흥남을 비롯한 관북 지방의 전력 수요에 응하는 한편, 광복 전에는 멀리 평양 · 서울에까지 송전을 하였다. 개마고원을 장진강과 함께 북류하다가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허천강에도 비슷한 수력발전소가 있다.

1941년에 허천강 상류에 해당하는 웅이강(熊耳江)과 황수원강(黃水院江)의 여러 곳에 댐을 축조하여 이 물을 부전령산맥을 뚫고, 그 물을 홍원 부근에서 단천 남대천(端川南大川)으로 낙하시켜 발전을 한다. 홍원에 있는 허천강 제1발전소는 발전시설용량이 14만 5000㎾이고, 제2발전소는 6만 9000㎾, 제3· 제4발전소는 각각 5만 8000㎾, 6만 6000㎾로서 총 발전시설용량은 35만 4000㎾이다.

압록강의 중류 지역인 삭주군 수풍면에는 1937년부터 광복 직전인 1944년 사이에 당시 세계적인 수력발전소로 알려졌던 수풍발전소가 축조되었다. 이 댐은 유효낙차가 100m밖에 안 되는 저낙차발전소(低落差發電所)이기는 하나 이 댐으로 만들어진 수풍호(水豊湖)는 그 면적이 345㎢나 되는 거대한 것이어서 유량이 풍부하므로 발전량이 64만㎾나 되어, 중국과 반반씩 전력을 나누었다. 이 전력은 신의주 · 평양 등에 송전하는 한편으로 청수 · 수풍을 중심으로 하는 화학공업을 발달시켰고, 카바이트 · 알루미늄공업 등을 발달시켰다. 정주에서 수풍 사이에 부설된 평북선은 수풍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한 각종 자재를 수송하기 위하여 부설된 철도인데, 오늘날에는 지역 발전을 위하여 이용되고 있다. 광복 전에 착공하였다가 광복 후에 북한에서 완공한 발전소로 운봉(雲峰)발전소와 독로강발전소가 있다. 운봉발전소는 만포에서 상류 쪽인 자성군 삼풍면 운봉동에 건설된, 압록강 본류에 건설하기로 예정된 일곱 개의 수력발전소 중에서 수풍에 이어 두번째로 건설된 발전소이다. 운봉발전소는 1949년에 준공되었는데, 출력은 50만㎾ 예정이었으나 25만㎾ 시설의 발전소로 건설되었다.

독로강발전소는 장진군 북면 이상리에 댐을 막아 만들어진 장진강 제3저수지의 물을 낭림산맥의 아득령(牙得嶺)을 터널로 뚫어 평안북도의 독로강으로 낙하시켜서 발전을 하는 유역변경식발전소이다. 1938년에 착공하여 1947년에 준공 예정이었으나, 공정 70% 과정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제1발전소는 강계군 공북면 문암동, 제2발전소는 공북면 승방동에, 제3발전소는 강계읍의 북문 밖에 있다. 이들은 총 25만㎾를 발전하고 있다.

관광자원

압록강이나 그 연안에는 대륙적인 광활하고 웅대한 경관이 전개되어서 우리나라 특유의 섬세하고 우아한 자연 경관과 대조를 이루는 곳이 많다. 압록강의 수원을 이루는 백두산은 관광 시설이 갖추어지면 원지(圓池) · 신무성(神武城) · 천지(天池) 등을 관광지로 개발할 수 있으며, 온천도 많이 개발할 수 있다. 개마고원에는 부전호 · 장진호 등이 있어 광복 전 조선 8경의 필두로 선정되었으며, 부전호반은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휴양지였다.

평안북도에는 후창군의 금강굴(金剛窟) · 나죽석벽(羅竹石壁), 자성군의 갈전협(葛田峽) · 오수덕고개 등이 있다. 강계군의 세검정(洗劍亭) · 인풍루(仁風樓), 위원군의 봉천대(奉天臺) · 숭정산(崇楨山), 초산군의 신막굴 등이 유명하다. 또 벽동군에는 구봉산(九峰山) · 탄금정(彈琴亭), 삭주군에는 수풍호 · 삭주온천 · 명당산(明堂山), 의주군에는 통군정 · 의주성(義州城) · 추월암(秋月庵) 등이 있다. 신의주에는 민족의 애수를 대표하는 압록강 철교가 있고, 부근에 천리장성과 위화도 등의 유적이 있다.

기타

압록강 유역은 원시림이 우거져 있어 우리나라 최대의 임업지역이다. 중류와 상류 유역에서 벌채된 원목은 수풍댐이나 만포선 · 혜산선 같은 삼림철도가 건설되기 전에는 혜산이나 신갈파진에서 집산되어 뗏목으로 하구의 신의주까지 운반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혜산선을 이용하여 길주 · 성진 등으로 운반되고 만포선을 통하여 평양 등지로 운반된다. 과거 광복 전에는 서울까지 수송되기도 하였다. 이곳의 원목들은 질이 좋아 주로 전주 · 침목 · 갱목 · 건축용재 · 토목용재로 이용되며, 신의주 · 길주 · 만포 등에서는 제재 · 제지 · 펄프공업이 발달하였다.

압록강 유역의 임산자원은 풍부해서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킬 때 압록강의 목재를 벌채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그 비용을 충당할 정도이다. 압록강에서는 예로부터 자가사리, 뱀장어, 돌잉어, 참붕어, 메기, 논갱이, 버들치, 새미, 가물치 등이 많이 잡혔다. 독로강, 충만강, 후창강 등의 상류에서는 열목어(熱目魚), 종개 등이 잡히고, 얕은 여울과 모래톱에서는 펄조개가 많이 잡힌다. 압록강 연안에서는 강가에 무성한 활엽수의 잎을 사료로 하여 산누에를 치는 농가가 많았으나 광복 직전에 거의 없어졌다. 압록강 유역에는 금 · 은 · 납 · 아연 · 흑연 · 운모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광복 전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한편 중국과 국경을 이루어 강을 건너 중국과 연결된 철도가 있다. 경의선의 종점인 신의주에서 중국의 안둥을 연결하는 압록강철교가 있는데, 이 철교는 광복 전에는 남만주철도, 시베리아철도에 이어져서 육로로 세계일주를 하는 간선철도를 이루었다. 다음으로 평북선은 정주와 수풍댐 사이에 통한 철도로, 강을 건너 중국의 철도와 연결된다. 만포선은 서포(西浦)에서 희천 · 강계를 거쳐 만포에 이르고, 압록강철교를 거쳐 중국의 지안에 이어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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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전유적유물지명표』(김원룡,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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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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