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과 화살
활과 화살
과학기술
물품
대나 나무 또는 쇠를 반달모양으로 휘어서 두 끝에다 시위를 걸고 화살을 시위에 걸어 당겼다 놓으면 자체 탄력을 받아 화살이 튀어나가는 무기.
정의
대나 나무 또는 쇠를 반달모양으로 휘어서 두 끝에다 시위를 걸고 화살을 시위에 걸어 당겼다 놓으면 자체 탄력을 받아 화살이 튀어나가는 무기.
개설

활은 주로 수렵이나 전투에 사용되었지만 연습, 의례, 심신수련에도 활용되었다. 보통 그 크기에 따라 장궁(長弓)과 단궁(短弓)으로 나누어진다. 장궁은 궁간(弓幹)이 길어 2m 이상에 이르며 주로 삼림지대나 해안지대의 민족이 사용한 활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및 동남아시아 여러 섬의 원주민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단궁은 반대로 궁간이 짧아 2m 이하가 보통이며, 한국·몽고 등 주로 초원민족이 사용하던 활이다.

또, 그 재료에 따라 통나무활[丸木弓]과 복합궁(複合弓)으로 나누어진다. 통나무활은 나무나 대나무의 한 가지 재료로 제작된 것이며 대개 장궁이다. 그러나 복합궁은 나무·대나무·뿔[角] 그리고 건(腱) 등을 붙여서 만든 활이며 대개 단궁이다. 따라서, 우리의 각궁(角弓)은 단궁이자 복합궁이며 그 성능이 뛰어나 사정거리가 길다. 이에 반하여 일본의 활은 장궁이요, 통나무활이며, 사정거리가 짧다.

우리 나라 활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계림유사』에 “궁을 활이라 한다[弓曰活]”, “쏘는 것을 활쏘아라 한다[射曰活索]”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활’과 ‘활쏘아’는 우리 고유어임을 알 수 있고, 화살 역시 활쏘아에서 유래한 우리 고유어이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시(矢) 또는 전(箭)인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활은 서양에서 들어온 양궁(洋弓)과 구별하기 위하여 국궁(國弓)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역사

우리 나라 활의 역사는 고조선의 단궁(檀弓)에서 비롯되는데, 단궁은 목궁(木弓)으로서 삼국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는 신식무기 각궁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단궁에 관한 기록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들 수 있는데, “예(濊)는 창[矛]을 만드니 길이가 3장(丈)이나 되어 몇 사람이 이를 들어야 한다고 하며, 또 보전(步戰)에도 능하고 낙랑단궁(樂浪檀弓)이 이 나라에서 나온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단궁은 부여·동옥저 등 여러 나라에서 모두 사용된 활이며 삼한(三韓)에서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낙랑단궁이란 조선단궁을 말하는 것으로서, 중국과 다른 우리 고유의 활, 즉 각궁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유득공(柳得恭)의 『사군지(四郡志)』에 보면 “속(俗)에 단(檀)을 일컬어 박달(朴達)이라 하는데 박달나무로 활을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단궁의 궁재(弓材)가 과연 박달나무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진서(晉書)』 숙신전(肅愼傳)에 “석노(石弩)와 피골(皮骨)로 만든 갑옷이 있는데, 단궁은 3척 5촌이요 그 화살인 호시(楛矢)는 길이가 1척 8촌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단궁이 단궁(短弓)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힘(弓力)은 위력적이어서 능히 국방의 주무기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즉, 단궁의 성능을 알기 위해서는 단궁의 맥을 이은 숙신의 호시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아야 하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그 실체를 유추, 파악할 수 있다.

중국문헌에 보면 숙신의 호시석노(楛矢石弩), 예의 단궁, 고구려의 맥궁(貊弓)에 관한 기록이 눈에 띈다. 『사기』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보면, “옛날에 무왕(武王)이 상(商)을 극(克)하고 도(道)를 구이(九夷)와 백만(百蠻)에 통하여 이에 숙신이 호시석노를 바치니 그 길이가 1척이요 지(咫)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읍루(挹婁)는 그 활의 길이가 4척이니 그 힘이 노(弩)와 같으며, 화살은 광대싸리[楛]나무를 사용하니 그 길이가 1척 8촌이며 청석(靑石)으로 화살촉을 만든다. 옛날의 숙신국은 활쏘기를 잘하여 사람을 쏘매 모두 맞고 화살촉에 독(毒)을 발랐으므로 사람에게 맞으면 모두 죽는다. 그 인구는 적으나 살고 있는 곳이 험한 산중인 데다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 활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정복하지 못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익(李瀷)이 쓴 『성호사설』에는 “숙신의 호노(楛弩)는 천하가 보배로 삼는다”고 칭찬하고 있다. 이것은 호시가 쇠를 뚫는 위력을 가졌기 때문이며 그 비결이 후세에 전수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호(楛)란 광대싸리나무를 말하며 그 주산지가 두만강구의 서수라(西水羅)였으므로 일명 서수라목이라고도 하였다. 서수라(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 서수라동)에는 진(鎭)이 있어 국경을 수비하는 군대가 상주하고 있었으며 그 주무기는 활이었다.

활 잘 쏘기로 유명하였던 조선 태조도 이 호시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용비어천가> 27장에 “태조께서 대소명적(大哨鳴鏑)을 쏘기를 좋아하시어 대나무를 쓰지 아니하시고 광대싸리로 화살을 삼으셨다”고 하였으며, 『성호사설』에도 “우리 태조께서는 늘 대우전(大羽箭)을 쓰시어 화살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숙신의 호시는 고구려를 거쳐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져왔을 뿐 아니라 여진(女眞)이 이를 계승, 천하를 통일하는 무기로 삼았던 것이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5에 보면 “현종 21년 여름 4월에 동여진의 만투(曼鬪) 등 60여 명이 과선(戈船) 4척과 호시(楛矢) 11만 7,600을 내헌(來獻)하다. 5월에 동여진의 봉국대장군(奉國大將軍) 소물개(蘇勿蓋) 등이 말 9필과 과선 3척 그리고 호시 5만 8,600 및 기장(器仗)을 내헌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화살촉으로 사용되던 청석은 백두산에서 비롯되는 장백산맥에서 나던 특수한 돌이었다. 즉, 『삼국지』 위지 읍루전에 “청석으로 화살촉을 만든다”고 하였고, 『진서』 숙신전에는 “이 나라의 동북쪽에 산이 있어 돌이 나오니 그 특징이 쇠를 뚫으며 이 돌을 캘 때는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를 드린다”고 하였다.

또, 오늘날 함경북도 경흥군의 서수라를 기점으로 하여 성진·종성·회령·부령 등지에서 백두산에서 나는 흑요석제(黑曜石製)의 화살촉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청석이란 바로 흑요석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리한 화살촉에 독약을 발랐는데 매년 7, 8월이 독약 채취의 적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원료가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화살촉에 바른 독약은 치명적이어서 고구려를 침략한 당태종(唐太宗)의 사인이 안시성에서 맞은 화살 때문이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다.

이상과 같이, 단궁의 맥은 고조선에서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에 새로 등장한 각궁 이후에도 여전히 쓰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각궁의 등장과 함께 단궁은 쇠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각궁은 단궁과 달리 그 재료가 다르다. 즉, 각궁은 속칭 산뽕나무로 알려진 자(柘)와 아주까리씨[山蓖麻子]를 재료로 하여 다양하다. 이 두 재료는 예로부터 궁간상(弓幹桑)·궁간목(弓幹木)으로 알려져 있어 좋은 활[好弓]은 반드시 활 전체의 재료로 이를 쓰며, 보통의 활은 궁간의 속알맹이로만 쓴다고 알려져왔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각궁의 재료인 아주까리씨는 평안북도 의주·창성·삭주·영변, 황해도 서흥·수안·곡산, 경상북도 영덕에서 나며, 산뽕나무는 평안남도 운산·개천, 경상남도 남해, 강원도 강릉·삼척·울진·정선 등지에서 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궁에서 각궁으로의 이행기는 삼국시대 초로 추정되는데, 고구려의 맥궁은 분명 각궁이었으며 백제와 신라 역시 각궁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시대에는 쇠뇌[弩]라는 신무기, 즉 포노(砲弩)가 등장하여 이를 수레에 싣고 다니는 차노(車弩)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단지 화살만은 남북이 서로 달라서 고구려에서는 호시, 신라와 백제에서는 죽전(竹箭)을 사용하였다. 죽전의 원료인 살대[箭竹]는 전국에서 생산되었으나, 특히 지리산의 것이 유명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그 재식(栽植)을 보호, 장려하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한층 활의 종류가 늘어나고 있는데, 그 일부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의 군제에 경궁(梗弓)·사궁(射弓)·정노(精弩)·강노(剛弩) 등 특과병이 있으며, 활에는 동궁(彤弓)·장엄궁(莊嚴弓)·세궁(細弓)의 3종, 화살에도 세전(細箭)·유엽전(柳葉箭)·대우전(大羽箭)·편전(片箭)의 4종이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쇠로 만든 철전(鐵箭)이 나타났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에 보면 “고려 궁전(弓箭)의 제도는 그 형상이 간략하고 마치 탄궁(彈弓)과 같고, 그 몸체의 길이가 5척이며 화살은 대를 사용하지 않고 많이는 버드나무 가지[柳條]를 사용하며, 또한 짧고 작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유전(柳箭)이 보급되어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종류

조선시대의 활은 대체로 일곱 가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으니, 전투용·수렵용·의식용·연습용 등 그 용도에 따라 대별된다.

① 정량궁(正兩弓):속칭 큰활이라 하며 길이는 5척 5촌이며 그 모양이 각궁과 유사하나 크고 두꺼워 힘이 세다. 무과(武科) 응시자는 모두 이 활로 시험하였으니 무인(武人)으로서 이 활을 쏘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② 예궁(禮弓):대궁(大弓)이 본래 이름이며 길이는 6척이고, 모양은 각궁과 유사하나 궁중연사(宮中燕射)와 반궁대사례(泮宮大射禮) 및 향음주례(鄕飮酒禮)에 쓰였으므로 예궁이라 불렸다.

③ 목궁(木弓):일명 호(弧)라고도 한다. 순전히 궁간목과 궁간상으로 제조하여 전투와 수렵에 쓰였다. ④ 철궁(鐵弓):철제 활로 전투용이다. ⑤ 철태궁(鐵胎弓):각궁과 모양이 같으나 간(幹)을 쇠로 만들며 전투와 수렵 공용이다. ⑥ 고(0x9566):속칭 동개활로서 가장 작은 활이다. 활과 살은 동개에 넣어 등에 지고, 달리는 말에서 쏘는 활로서 전투용이다. ⑦ 각궁(角弓):일명 후궁(㢿弓) 또는 장궁(長弓)이라 하며 현재 사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국궁이다. 전투·수렵용과 연회·연습용의 두 종류가 있다.

화살의 종류는 모두 8종으로서 그 중 유엽전만 오늘에 전한다.

① 목전(木箭):이름과 같이 나무로만 만든 활로서 무과에서 쓰인다. ② 철전:3종이 있으니 ㉠ 육냥전(六兩箭):무게가 6냥이라 하여 육냥전이라고 하며 정량궁에 쓰인다 하여 정량(正兩)이라고도 한다. ㉡ 아량(亞兩):무게가 4냥이다. ㉢ 장전(長箭):무게가 1냥 5, 6전(錢)으로 전투용이다. ③ 예전(禮箭):예궁에 쓰이는 화살로서 깃이 큰 것이 특징이다.

④ 편전:속칭 애기살이라 하며 길이가 8촌, 사정거리가 1,000보(步)에 이르는 데다가 화살이 착력(着力)이 강하고 화살촉이 예리하여 철갑을 뚫는 위력을 발휘한다. ⑤ 동개살:일명 대우전이라 하며 동개활에 쓰이는 기사용(騎射用)이다.

⑥ 장군전(將軍箭):순전히 쇠로 만든 화살로서 무게가 3∼5근이며 포노(砲弩)로 발사, 적선을 파괴하는 위력을 가졌다. ⑦ 세전:속칭 가는대라고도 하며 적진에 격문을 보낼 때 쓰는 활로서 연습시에는 280보를 쏘아야 한다. ⑧ 유엽전:연습용 각궁에 쓰이는 화살로 120보가 표준이다. 화살촉은 날카롭지 않아야 한다.

활의 제작

역사적으로 볼 때 활의 종류는 다양하나 현재는 조선시대의 각궁 제작방법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따라서, 여기에 소개하는 활의 제작방법은 각궁의 제작기술이다.

먼저 각궁 제작에 쓰이는 재료로서는, ① 물소뿔[黑角, 水牛角], ② 소힘줄, ③ 대나무, ④ 뽕나무조각, ⑤ 민어부레풀[魚膠], ⑥ 화피(樺皮) 등을 들 수 있고, 연모로는 ① 뒤짐, ② 도지개, ③ 밧줄, ④ 조막손, ⑤ 궁창(弓窓), ⑥ 사련톱, ⑦ 사련칼, ⑧ 덧피, ⑨ 전판, ⑩ 못탕, ⑪ 도가니, ⑫ 환, ⑬ 심풀빗, ⑭ 톱 등이 쓰인다.

이상과 같은 재료와 연모가 준비되면 제작에 들어간다. 활을 만드는 최적기는 일년 중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이다. 그 이유는 활의 재료로 쓰이는 민어부레풀과 같은 동물성접착제는 습기가 많고 기온이 높은 계절에는 접착하지 않기 때문이며, 완성된 활을 관리하는 데에도 습기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활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대나무조각·뽕나무조각·물소뿔 등을 궁창 위에 올려놓고 다듬는다. 그리고 대나무와 뽕나무는 화롯불에 쬐어 구부린 다음 연결시킨다. 이것을 연심(聯心)이라 한다. 이때 대나무 끝을 V자형(노루발 또는 제비부리)으로 도려내고, 뽕나무 끝은 V자형의 반대모양으로 엇물리게 하여 풀칠하여 끼운다.

다음에는 물소뿔을 표면에 붙인다. 물소뿔을 붙일 때에는 뒤짐을 안쪽에 대고 조막손으로 밧줄을 감아 밀착시킨다. 18℃ 이하의 온도에서 3시간 지난 뒤 밧줄을 풀어 뒤짐을 제거하고 참나무(대림목)를 붙인다. 그리고 나서 소힘줄을 활에 올리는 ‘심놓이’작업을 7, 8일간 반복해서 실시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 뒤 약 1개월간 25∼34℃까지 올리면서 밀폐된 장소에 보관한다. 이 건조과정을 점화관리(點火管理)라 한다. 건조과정이 끝나면 고자깎기를 한다. 이상의 공정으로 활의 몸체가 대개 완성되는데, 해궁작업(解弓作業)이 남아 있다. 해궁작업에서는 활 사용자의 체력에 맞추어 활의 강연(剛軟)이 조절된다. 그 뒤에는 활의 단장작업이 남게 되는데, 활 하나를 만드는 데 약 4개월의 기간이 소요된다.

이와 같이, 각궁의 제작과정은 복잡하며 그 보관방법도 까다롭다. 각궁은 습기를 피하여 늘 건조한 장소에 보관해야 하며, 여름에는 30∼34℃, 겨울에는 27∼30℃의 온도를 유지하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온돌방이 각궁 보관에 가장 적당한 장소이다.

화살의 제작

현재 사용되고 있는 화살은 죽시(竹矢)로서 원래의 이름은 유엽전이다. 유엽전의 길이는 약 80㎝(2자 6치 5푼)이며, 쏘는 사람의 팔과 활의 길이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무게는 7돈쭝(26∼25g)이 평균이다. 화살의 몸체는 대나무이며 오늬는 싸리나무, 깃은 꿩깃이다. 화살의 재료는, ① 대나무, ② 광대싸리나무, ③ 도피(桃皮), ④ 깃[羽], ⑤ 둥근촉, ⑥ 소힘줄, ⑦ 민어부레풀 등이다.

제작과정을 보면, 화살의 몸체로 마디 있는 시누대(식대 또는 海藏竹)를 골라 쓰며, 충분히 건조시켜 곧게 잡은 뒤 오늬와 깃을 다는 작업에 들어가는데, 활을 만들 때처럼 공정이 까다롭다.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궁시장(弓矢匠)의 기능보유자로는 김장환(金章煥)·장진섭(張鎭燮)·권영록(權寧錄)·이석훈(李碩薰) 등 4명이 있다.

활터

① 관설사장:국가가 활터를 도성 안에 설치한 기록으로는 고려 선종 8년(1091) 호부(戶部) 남랑(南廊)에 사장을 설치하여 습사(習射)한 것이 최초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한양에 정도한 뒤 도성 동편에 교장(敎場)을 설치하였으니, 이를 훈련원이라 하며 태종이 사청(射廳)을 세워 군사들의 습사를 권장한 바도 있다. 인조 때에 이르러 모화관(慕華館)이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서울에는 훈련원을 일소(一所), 모화관을 이소(二所)라 하여 무과시험을 보고 평소에는 무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또, 궁중에는 창경궁 후원에 춘당대(春塘臺), 경복궁 후원에 경무대(景武臺)가 있어 춘당대에서는 왕이 친사(親射)하였다. 경무대는 경복궁 중수가 끝난 고종 5년(1868)에 설치되었다.

지방에는 부(府)·주(州)·목(牧)의 소재지에 각각 장대(將臺)·연무대(鍊武臺)·관덕정(觀德亭) 등의 관설사장이 있어 군사는 물론, 민간인도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② 민간사장:민간사장의 유래는 임진왜란 후 선조가 경복궁 동쪽에 오운정(五雲亭)을 설치, 민간에 개방한 것이 그 시초로 알려지고 있다. 그 뒤 서울에는 우후죽순처럼 사장이 개설되었으니 그 가운데서 유명한 것을 열거하면 먼저 윗대[右村]의 백호정(白虎亭), 아랫대[下村]의 석호정(石虎亭), 새문(西大門) 밖의 노지사정(盧知事亭), 강교(江郊)의 풍벽정(楓碧亭) 등 4정을 들 수 있다.

이 4정 이외에도 남촌(南村)에 상선대(上仙臺), 삼문교에 세송정(細松亭)·왜장대(倭將臺)·청룡정(靑龍亭)·읍배당(揖拜堂) 등이 있었으며, 북촌(北村)에는 일가정(一可亭)·흥무정(興武亭)·취운정(翠雲亭) 등이 있었다. 윗대에는 윗대5터라 하여 다섯 활터가 있었고, 아랫대에는 아랫대4터라 하여 네 활터가 있었다.

이 밖에도 문 안에는 여러 민간사장이 있었으며 문 밖에도 동대문 밖의 젖나무터와 썩은 바위터, 남대문 밖의 청학정, 수구문(水口門) 밖의 무학정 등이 산재하여 있었다. 1895년 갑오경장 때 이들 활터는 일시에 모두 폐쇄되었으나 1899년 고종이 경희궁 안에 황학정(黃鶴亭)을 설치한 것을 계기로 아랫대에 황룡정, 남촌에 석호정 등의 활터가 차례로 부흥되었다.

사풍

활터에서는 사원(射員) 상호간에 지켜야 할 예의와 규율이 있으니 이를 어기면 벌칙을 받았는데, 이를 사풍(射風)이라 한다. 사원은 모름지기 스승을 존대하고 선배를 존경하며 동지에게 겸양하는 예절을 지켜야 한다.

활터에는 활터를 대표하는 장이 있는데 그를 사두(射頭)라 하며, 사원에게 활쏘기를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 또, 사두의 명령에 따라 일반 사원을 통할하는 행수(行首)가 있다. 이들 사두와 선생 및 행수는 일반 사원에 대하여 견책(譴責)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직권을 가지고 있다.

사원이 준수해야 할 규율에는 견책 이외에 계급·신입사(新入射)·취격벌(取格罰)·연전(揀箭)·영접(迎接)·등정(登亭) 및 초순(初巡)·연전띠내기[賭揀箭隊]·줄내기[賭跪]·고풍(古風)·팔지동[腕上下序]·순차례[射巡序]·대우별선(待遇別選)·처음입사[初入射]·사계(射稧)·편사(便射)·이접(移接) 등이 있었다.

편사

활터와 활터 사이에 시합을 걸어 승부를 결하는 것을 편사(便射)라 한다.

종류

편사에는 두 편의 사원을 각각 15명씩 뽑아 삼순(三巡)의 시수(矢數)를 계산하여 그 승부를 결한다. 편사에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 종류가 있었다.

① 터편사[亭便射]:활터와 활터 사이의 편사를 말한다. ② 골편사:남촌과 북촌이 각기 그 골 안의 활터를 연합하여 기예를 겨루는 것을 말한다. ③ 장안편사:도성 안의 몇 개 활터가 한편이 되어 다른 한 구역의 활터와 기예를 겨루는 시합을 말한다. ④ 사랑편사(斜廊便射):활터의 관할을 떠나 사랑과 사랑의 교유하는 무사들이 편을 짜서 시합하는 것을 말한다. ⑤ 사계편사:역시 활터의 관할과 무관하게 사계(射稧) 상호간의 편시합을 말한다.

⑥ 한량편사:활터의 한량(閑良)에 한하여 편을 짜서 시합하는 것을 말한다. ⑦ 한출편사(閑出便射):각기 한 활터의 한량과 출신이 연합하여 편사하는 것을 말한다. 한량 출신이란 무과합격자를 뜻한다. ⑧ 삼동편사(三同便射):당(堂) 한 사람, 무과 출신 한 사람, 그리고 한량 한 사람이 편을 짜서 활터끼리 겨루는 시합이다.

⑨ 남북촌편사:고종 17년(1880)에 개최된 편사로 종로 이북과 이남을 갈라서 편을 짜 시합하는 것을 말한다. ⑩ 아동편사:동네 아동들끼리의 시합으로, 궁술 장려를 위한 편사이다.

위의 10종 가운데 ①·②·③은 갑종즉정식(甲種卽正式)의 시합이며, ④·⑤·⑥·⑦·⑧·⑨는 을종즉변칙(乙種卽變則)의 편사라 할 수 있고, 마지막 아동편사는 병종즉격외(丙種卽格外)의 편사라 할 수 있다.

절차

편사는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거행한다. 먼저 편사를 발기하는 활터에서 선단(宣單)을 작성하여 사두·선생·행수가 서명한 다음 두 사람이 다른 활터에 가지고 간다. 두 사람이 선단을 가지고 활터에 이르면 “아무 활터에서 단자(單子)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인사한다. 인사를 받은 활터에서는 의관을 정제하고 선단을 받고 두 사람에게 “쉬어 가십시오.”라고 권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손히 사양하고 돌아가야 한다.

선단을 받은 활터에서 만일 사정이 있어 편사에 응할 수 없으면 3일 안에 거절하는 방단(防單)을 써서 상대 활터에 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편사에 응할 때에는 먼저 사원 가운데서 수때를 정하여 편사에 나아갈 사원을 실제 습사로 우열을 가려 뽑고 준비가 완료되면 상대 활터에 응단(應單)을 보낸다. 그 절차는 선단 보낼 때와 같이 정중하게 한다.

응단을 받은 활터에서는 3일 이내에 편사의 날짜를 적어 답장을 보내게 되는데, 이 답장을 지일단자(指日單子)라 한다. 지일단자를 받은 활터에서는 수때를 비롯한 15명의 선수를 최종 선발하며 수때가 선수들에게 주의사항을 훈시한다.

“편사 당일에 술을 마시지 말 것, 활터에서는 몸을 단정히 하고 웃거나 잡담하지 말 것이며, 좌우를 돌아보지 말 것이다. 또, 활을 쏠 때에는 기운을 내리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 조금도 조급하지 말 것이며, 집궁(執弓)·방전(放箭)과 궁체법식(弓體法式)을 십분 명심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고 이른다.

편사 전날 출정에 앞서서 선수들은 자기 활터에서 고사(告祀)를 지낸다. 제물은 청주·삼색과일·찹쌀시루떡·쇠머리 또는 돼지머리이며 낮이라도 초 두 자루에 불을 켜서 백지 열여섯 장을 태운다. 그 첫 장은 부정소지(不淨燒紙)로 태우며, 나머지 열다섯 장은 수때를 비롯한 출정선수들을 위한 소지로 태운다. 고사가 끝나면 모두 음복(飮福)하고 초를 열다섯 조각으로 갈라 나누어 가진다.

편사를 청한 활터에서는 시합 당일 도청(都廳)을 차려놓고 모든 준비를 하고 기다린다. 응사(應射)할 활터로부터는 군막(軍幕)을 가지고 와서 설치하고 시지(試紙)와 붓·벼루·먹 등을 준비하는 한편, 군막 앞에 사정기(射亭旗)를 꽂아 세운다. 만일, 응사하는 활터가 여럿이면 각기 군막을 세워 깃발을 나부끼게 되는 것이다.

각 정 대표가 나와 활쏘기시합을 하게 되면 이를 정순(定巡)이라 하며 시합성적을 정시지(正試紙)에 적되 적는 이를 척관이라 한다. 과녁[貫革]에 화살이 명중하면 이를 관중(貫中)이라 하는데, 정시지에는 이를 ‘변(邊)’ 또는 ‘중(中)’이라고 적는다. 맞지 않으면 ‘실(失)’이라 기록한다.

화살이 과녁을 맞추었을 때 거기한량(擧旗閑良)이 기를 들고 흔들어 보이며, 장족한량(獐足閑良)이 과녁 앞에 가서 화살이 맞은 곳을 두들기며 명중사실을 확인한다. 또, 기생이 있을 때에는 “아무 서방님 일시(一矢)에 관중이오”라 소리치면서 <지화자>를 부른다.

본래는 5중(中)하였을 때만 부르던 것을 뒷날에 1중에도 부르게 되었으니 일종의 파격(破格)이라 할 수 있다. <지화자>에 이어 풍악을 울리게 되는데, 1·2중에는 장영산(長靈山) 곡조를, 3중에는 염불곡을, 4·5중에는 타령조를 울린다.

주최측인 선단활터와 초청받은 응단활터가 동점인 경우에는 주최측이 진 것으로 간주한다. 응단활터 상호간에 동점을 얻었을 때에는 다시 15명이 나와 일순(一巡)한 뒤 시수(矢數)를 따져 승부를 결정한다. 이렇게 하여 우승한 활터가 결정되면 그 군막에 기생과 풍악을 보내어 축하하며, 돌아갈 때에도 우승 활터 선두에는 기를 앞세우고 풍악이 뒤따라 승전을 자랑하며, 기생은 <태평곡>이나 <길군악>을 불러 전승의 기쁨을 뽐내었다.

만일, 다시 편사를 원할 때에는 진 쪽이 이긴 편에 대하여 청하게 되어 있었다. 그 인사말은, “폐정으로 일차 왕림하오소. 오늘 미진한 정을 창서(暢敍)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한다. 이 청을 받은 활터는 반드시 응하여야 하며 청한 쪽은 구두 또는 서면으로 시합 날짜를 정하여야 한다. 이를 ‘지고 청하는 편사(負後更請便射)’라 한다.

‘지고 청하는 편사’의 경우에는 편사 당일의 일체 비용을 청한 쪽에서 부담하게 되어 있어 응사하는 활터에서는 활과 화살만 들고 오면 되었다. 군막은 물론 점심까지 대접하게 되어 있었다. 점심 차림은 흰밥·잡탕·나물·김치·깍두기·진찬합·건찬합·주발 그리고 수저 열다섯 벌이고, 술은 제외되었다.

점심을 각 군막에 보낼 때에도 사원 2명이 가서 “왔습니다.”라고 먼저 인사하면 군막에서 “오시오”라고 대답한다. 두 사람이 “점심 가져왔습니다. 찬수는 없사오나 많이 잡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인사하고 돌아간 뒤, 점심을 마친 군막에서는 “점심을 보내주셔서 잘 들고 감사하오이다”라고 인사한다.

시합이 늦어 해가 지면 촛불과 사동을 군막에 보내어 돌아갈 때 거화(炬火)하도록 주선하여야 한다. 편사는 참가 활터가 돌아가며 한번 지고 청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원칙이나 두번 지고 청하는 편사(連負再請便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에는 선수 명단을 바꾸어 시합하게 되어 있었다.

화살이 과녁에 맞고 맞지 않는 경우를 판정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었다. ① 화살이 과녁에 맞고 나무조각을 떼었으나 화살이 과녁에 꽂히지 않은 경우, 떨어져 나온 나무조각을 저울에 달아서 세돈쭝(3錢)이 되면 맞은 것으로 인정하고, 그렇지 못하면 맞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② 과녁에 틈이 있어 화살이 그 틈을 지나가면 맞은 것으로 한다.

③ 화살이 과녁의 위턱을 치고 나가면 맞지 않은 것으로 한다. ④ 화살이 과녁에 미치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가 다시 튀어서 과녁에 맞는 경우 점심살이라 하는데, 그 화살이 과녁에 꽂혔을 때에만 맞은 것으로 간주한다. ⑤ 살이 과녁에 맞았으나 촉만 박히고 살대가 땅에 떨어졌을 경우에는 맞은 것으로 한다.

역대의 선사

활 잘쏜 이를 선사(善射)라 하였다. “수성(守城)에 능한 자 고려와 같은 나라가 없으며, 공성(攻城)에 능한 자 또한 고려와 같은 나라가 없다.” 당대 이후 중국인이 하던 말이다. 따라서, 역대 명궁(名弓)·선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이나, 후대에 전하지 않는 이름이 많아 다만 여기서는 기록에 남은 선사의 이름과 그 특기만을 나열한다. 특히, 삼국시대 이전의 선사는 전하지 않으므로 여기에서 제외한다.

삼국시대

① 동명성왕:일명 주몽(朱蒙). 주몽은 선사자를 가리키는 부여어이다. 7세 때부터 궁시를 자작(自作)하여 쏘면 백발백중이라 주몽이라고 일컬어졌다. 22세 때 비류왕과 활을 겨루는데, 100보 밖에 옥지환(玉指環)을 걸어두고 맞추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② 다루왕:백제 시조 온조왕의 원자(元子)로, 횡악산(橫岳山) 기슭에서 왕이 사냥할 때 쌍록(雙鹿)을 연중(連中)한 일이 있다고 전한다. ③ 고이왕:백제 8대왕으로, 동왕 3년 겨울 서해(西海) 대도(大島)에서 사슴 40마리를 쏘아 맞혔다고 전한다. ④ 비류왕:백제 11대왕. ⑤ 계왕:백제 12대왕. ⑥ 동성왕:백제 24대왕.

⑦ 눌최노(訥崔奴):신라 진평왕 때 눌최의 노예 가운데 선사자가 있어 백제의 침공시에 선전, 전사하였으나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⑧ 천헌성(泉獻城):고구려연개소문(淵蓋蘇文)의 손자로 남생(男生)의 아들이다. 당무후(唐武后) 때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이며, 선사자로 이름이 났다고 전한다.

고려시대

① 문종:11대왕. ② 예종:16대왕. ③ 의종:18대왕. 동왕 21년 5월 장단현(長湍縣) 응덕정(應德亭)에서 과녁 위에 촛불을 켜놓고 맞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④ 지채문(智蔡文):현종이 거란병을 피하여 남순할 때 수행선사로서 도둑을 물리쳤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⑤ 유현(惟現):문종 때의 낭장(郎將). 대동강 건너 대안까지 활을 쏘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⑥ 고열(高烈):문종 때의 선사. ⑦ 김정순(金正純):예종 때 윤관(尹瓘)을 따라 여진을 정벌하였고, 인종 때 김부식(金富軾)을 따라 묘청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운 선사자로 황주인(黃州人)이다. ⑧ 최정(崔挺):예종 때 여진 정벌에 종군한 선사자. ⑨ 함유일(咸有一):인종 때 묘청의 난 정벌에 종군한 선사자. ⑩ 서공(徐恭):서희(徐熙)의 현손으로, 의종이 서도(西都)를 순행할 때 과녁 위에 촛불을 꽂고 맞춘 선사자.

⑪ 김경손(金慶孫):고종 때 몽고군의 내침시 구주싸움에 승리한 선사자. ⑫ 이자성(李子晟):우봉인(牛峰人). ⑬ 한희유(韓希愈):가주리(嘉州吏). ⑭ 조선도조(朝鮮度祖):태조의 할아버지. ⑮ 조선환조(朝鮮桓祖):태조의 아버지. 유실(柳實):우왕대. 정지(鄭地):공민왕대. 윤가관(尹可觀):공민왕대. 황상(黃裳):공민왕대. 군만(君萬):공민왕대. 현문혁(玄文奕):원종대. 반복해(潘福海):우왕대 등이다.

조선시대

태조·태종·세조·이지란(李之蘭, 태조대)·최윤덕(崔潤德, 세종대)·이맹종(李孟宗: 방간의 아들)·김덕생(金德生, 태종대)·김윤수(金允壽, 세종대)·배우문(裵珝文, 세종대)·이석정(李石貞, 세종대)·김속시(金束時, 세조대)·임성정(任城正, 세종대)·유응부(兪應孚, 세종대)·이징옥(李澄玉, 세조대)·박중선(朴仲善, 세조대)·구치홍(具致洪, 세조대)·이종생(李從生, 세조대)·어유소(魚有沼, 세조대)·황치신(黃致身)·봉석주(奉石柱)·신종군 효백(新宗君孝伯)·이광(李光)·유순정(柳順汀, 연산군대)·박영(朴英, 중종대)·신용개(申用漑, 중종대)·한충(韓忠, 중종대)·유용근(柳庸謹, 중종대)·황형(黃衡, 중종대)·윤희평(尹熙平, 중종대)·임형수(林亨洙, 인종대)·조광원(曺光遠, 성종대)·장필무(張弼武, 중종대)·이양생(李陽生)·한봉운(韓奉運)·김세적(金世勣, 성종대)·민발(閔發)·구문로(具文老, 세조대)·김세한(金世翰)·이희안(李希顔, 명종대)·이항(李恒, 연산군대)·김행(金行)·최경창(崔慶昌)·김여물(金汝岉, 선조대)·방진(方震, 선조대)·심수경(沈守慶, 선조대)·이순신(李舜臣, 선조대)·황진(黃進, 선조대)·김명원(金命元, 선조대)·장응기(張應祺, 선조대)·신호(申浩, 선조대)·정발(鄭撥, 선조대)·임정식(任廷式)·홍계남(洪季男)·신몽헌(申夢憲, 광해군대)·장만(張晩, 인조대)·박의(朴義, 인조대)·능창군(綾昌君, 인조대)·노지사(盧知事, 인조대)·김응하(金應河, 광해군대)·장린(張遴, 효종대)·서유대(徐有大, 영조대)·안득붕(安得鵬, 정조대)·최길진(崔吉鎭, 철종대)·권대규(權大奎)·배익환(裵益煥)·안택순(安宅舜, 고종대)·박인회(朴寅會, 고종대)·한문교(韓文敎, 고종대)·양기환(梁基煥, 고종대)·김학원(金學源, 고종대)·정행렬(鄭行烈, 고종대) 등이다.

궁술

활쏘는 기술에 대해서는 주로 구전으로 전해져 왔으므로 문헌에 남은 것이 없다. 다행히 『조선의 궁술』에 그 대강이 적혀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활을 쏘는 데 왼손잡이가 있고 오른손잡이가 있는데, 전자를 좌궁(左弓), 후자를 우궁(右弓)이라 한다.

그러나 궁술과 궁체(弓體), 즉 활쏘는 자세에 있어서는 서로 다름이 없다. 궁체는 몸·발·불거름[膀胱]·가슴통·턱끝·목덜미·줌손[弝手]·죽머리[肩髆]·중구미[肘]·등힘[弝手背力]으로 나누어 설명된다.

가령, “몸체는 곧은 형세로 서서 과녁을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발은 ‘丁’자 모양도 아니요 ‘八’자 모양도 아닌 체형으로 벌려 서되, 앞과 뒤 두 발에다 고루 중량을 실어야 한다. 불거름은 팽팽하여야 한다. 팽팽히 하는 법은 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쓰는 것이다. 가슴통은 비어야[虛] 한다. 턱끝은 들려서는 안된다. 목덜미는 항상 오므리거나 구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사격자세에 대한 설명이 그 경우이다.

그 밖에도 “줄에 힘이 들면 맞추기가 어렵다. 살이 한 배를 얻어야 많이 맞는다. 방사(放射)할 때에 시위가 뺨을 치거나 귀를 치는 것은 턱을 든 때문이다”라는 등 사법(射法)의 설명이 있다.

참고문헌

『조선의 궁술』(이중화, 조선궁술연구회, 1929)
『한국의 궁술』(양재연, 문화재관리국, 1970)
「궁시장」(박진주·심우성 편, 『무형문화재총람』, 1975)
『한국의 궁도』(대한궁도협회, 1986)
「각궁과 화살의 제작」(박희현, 『한국민속학』 10, 조선민속학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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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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