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성필(聖弼), 호는 인봉(麟峰). 전라남도 담양 출신. 통정대부 용양위 부호군 고휘진(高輝鎭)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이다. 병술에 조예가 깊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족손(族孫) 고광순(高光洵)이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일으켜 나주로 향하려 할 때 마침 병이 중하여 종군을 후일로 미루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고광순과 순창에 이르렀으나, 최익현 의진은 패전하여 20여 의사들과 더불어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다시 기우만·백낙구(白樂九)와 거병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적에게 탐지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먼저 집안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 저산(猪山)의 제각(祭閣)에서 12월 거병하여 고광순의 부장(副將)으로 활약하였다.
12월 말 남원의 양한규(梁漢圭)와 남원 함락을 계획, 남원성으로 진격하여 관군과 접전하였다. 그러나 양한규가 전사하고 남원의진이 붕괴하여 퇴진하였다. 1907년 5월 능주를, 8월 동복을 공격하였다. 고씨문중 의진의 활약이 알려지자, 일본군이 고씨 종가를 습격해 사당을 제외한 일가의 집과 인명에 크게 해를 입혔다.
그후 지리산 문수암(文殊庵)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김동신(金東臣) 의진과 연합작전을 구상, 8월 구례 연곡사(燕谷寺) 주변에 머무르면서 병력과 군량을 보충한 뒤 화개동·문수암 일대를 거점으로 적과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에 일본군이 지리산 일대의 의병을 모두 없앨 계획으로 야습을 감행, 9월 17일 10여 명의 부하 장졸 및 대장과 함께 전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