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흥(長興). 초명은 고광욱(高光旭) 또는 고광순(高光珣 · 高光詢). 자는 서백(瑞伯), 호는 녹천(鹿川). 전라남도 담양 출신. 생부는 고정상(高鼎相), 양부는 고경주(高慶柱), 항일투사 기산도(奇山度)가 사위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각 읍에 격문을 띄우고,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모집하여 좌도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나주를 본영으로 의병을 불러모으자 일본군이 나주로 집결하므로 광주(光州)로 옮겼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북진하던 중 선유사(宣諭使)의 권고로 의병을 해산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1906년 윤4월 최익현(崔益鉉)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고제량(高濟亮)과 함께 그를 찾아 순창에 이르렀으나, 최익현은 이미 패전하여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다시 기우만 · 백낙구(白樂九)와 모사하였으나, 그들도 곧 붙잡혔다.
1907년 1월 24일 저산(猪山)의 제각(祭閣)에서 고제량 · 고광훈(高光薰) · 고광채(高光彩) 등 족친들과 윤영기(尹泳淇) · 박기덕(朴基德)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12월 말 남원의 양한규(梁漢圭)와 남원성을 공격, 관군과 접전을 벌이던 중 양한규가 죽고 남원의진이 붕괴하여 퇴진하였다. 1907년 5월에는 능주(綾州), 8월에는 동복(同福)을 습격하였다.
그 뒤 지리산 문수암(文殊庵)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김동신(金東臣)과 연합작전을 구상, 지리산으로 집결하였다. 그 동안 고광순의 종가는 적의 습격으로 사당만 화를 면하였을 뿐 피해가 컸다.
8월 구례 연곡사(燕谷寺)로 가서 화개동(花開洞)과 문수암 일대를 거점으로 대원들을 머무르게 한 뒤, 군대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보충하며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깃발을 만들어 의기를 북돋웠다.
그 뒤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9월 적의 연곡사 복멸작전에 의한 야습을 받아 부장인 고제량을 비롯, 주요 장졸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