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순 ()

구례 고광순 순절비 정측면
구례 고광순 순절비 정측면
근대사
인물
개항기 때,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좌도의병대장으로 활약한 의병장.
이칭
서백(瑞伯)
녹천(鹿川)
이칭
고광욱(高光旭), 고광순(高光珣·高光詢)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48년(헌종 14)
사망 연도
1907년(고종 44)
본관
장흥(長興)
출생지
전라남도 담양
관련 사건
을미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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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개항기 때,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좌도의병대장으로 활약한 의병장.
개설

본관은 장흥(長興). 초명은 고광욱(高光旭) 또는 고광순(高光珣 · 高光詢). 자는 서백(瑞伯), 호는 녹천(鹿川). 전라남도 담양 출신. 생부는 고정상(高鼎相), 양부는 고경주(高慶柱), 항일투사 기산도(奇山度)가 사위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각 읍에 격문을 띄우고,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모집하여 좌도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나주를 본영으로 의병을 불러모으자 일본군이 나주로 집결하므로 광주(光州)로 옮겼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북진하던 중 선유사(宣諭使)의 권고로 의병을 해산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1906년 윤4월 최익현(崔益鉉)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고제량(高濟亮)과 함께 그를 찾아 순창에 이르렀으나, 최익현은 이미 패전하여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다시 기우만 · 백낙구(白樂九)와 모사하였으나, 그들도 곧 붙잡혔다.

1907년 1월 24일 저산(猪山)의 제각(祭閣)에서 고제량 · 고광훈(高光薰) · 고광채(高光彩) 등 족친들과 윤영기(尹泳淇) · 박기덕(朴基德)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12월 말 남원의 양한규(梁漢圭)와 남원성을 공격, 관군과 접전을 벌이던 중 양한규가 죽고 남원의진이 붕괴하여 퇴진하였다. 1907년 5월에는 능주(綾州), 8월에는 동복(同福)을 습격하였다.

그 뒤 지리산 문수암(文殊庵)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김동신(金東臣)과 연합작전을 구상, 지리산으로 집결하였다. 그 동안 고광순의 종가는 적의 습격으로 사당만 화를 면하였을 뿐 피해가 컸다.

8월 구례 연곡사(燕谷寺)로 가서 화개동(花開洞)과 문수암 일대를 거점으로 대원들을 머무르게 한 뒤, 군대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보충하며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깃발을 만들어 의기를 북돋웠다.

그 뒤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9월 적의 연곡사 복멸작전에 의한 야습을 받아 부장인 고제량을 비롯, 주요 장졸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의재실기(義齋實紀)』
『매천야록(梅泉野錄)』
「한말 고광순(高光洵)의 의병활동과 지리산근거지론(智異山根據地論)」(홍영기, 『역사학연구』47, 2012)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자료집』 2·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朝鮮獨立運動』 Ⅰ(金正明 編, 原書房, 1967)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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