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양월서(梁月瑞). 자는 문찬(文贊), 호는 칙헌(則軒) · 초계(初桂, 草溪). 전북 남원 출신. 증호조판서 양맹석(梁孟錫)의 아들로,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남원부사 심의두(沈宜斗)에게 청하여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상경하여 난군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심의두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91년 선략장군 부사과(宣略將軍副司果), 이듬해 통훈대부초계군사 겸내금위장(通訓大夫草溪郡事兼內禁衛將)에 제수되고 이어 통정대부가 가자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국권을 회복하고자 널리 우국지사와 연락하여 군사를 모으니 영남 · 호남에서 1,000여 명이 호응하였다. 1907년 2월 12일(음력 12월 30일) 남원 진위대 성내 장병이 연말연시를 맞아 휴가나간 틈을 이용하여 읍을 점령, 무기를 접수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휘하 100여 명의 정예병을 비롯, 참봉 유병두(柳秉斗)의 군사 50명 및 진사 박재홍(朴在洪), 상인 양문순(梁文淳) 등 많은 의병에 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뒤 13일 새벽 읍내로 진군, 남원성에 입성하였다.
광한루에 본진을 두고 있던 일본군과 진위대가 의병들의 급습에 놀라 무기를 둔 채 성밖으로 도주하자, 무기 · 군수품을 그대로 접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던 중 유탄에 맞아 죽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