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대한제국기 때, 호남창의회맹소에서 도통령으로 활약한 의병장.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8월 8일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11일 김형식(金炯植)·박용근(朴溶根) 등 의병 100명이 모여들었다. 9월 6일 적 20명과 연곡사(蓮谷寺)에서 접전하여 10여 명을 포살하였다. 그리고 9월 24일 장성에서 대오를 정비하고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여 기우만을 맹주로 추대, 도통령(都統領)이 되어 장성·함평·영광·고창 등지에서 교전하였다.
1907년 12월 중순 선운사(禪雲寺)에서 머무를 때 외아들 김기봉(金起鳳)이 합류하였는데, 13일 흥덕 안치(安峙)에서 벌여진 전투에서 김기봉이 전사하였다. 28일 대장 기삼연의 발 부상으로 순창에서 군통수권을 위임받았는데, 며칠 뒤 기삼연은 붙잡혀 총살되었다.
1908년 1월 19일 탑정리에서 머무르던 중 적의 기습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탄환이 부족하여 다내동으로 철수하였다. 2월 19일 고창 읍내로 들어가 세무 주사 서상달(徐相達)을 사살하였으며, 24일 장성 송치(松峙)에서 적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같은 해 3월 8일 구수산(九岫山)에서 적의 기병·보병 등 4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23일 대덕리에서, 4월 11일에는 무장 선운사에서 접전하였으며, 17일 무장 와공면에서 머무르던 중 적의 기습에 맞서 수십 명을 사살하였으나, 총상을 입고 고산으로 후퇴하여, 18일 방장산(方丈山)에 머물렀다.
그러나 정신이 계속 혼미하자, 군통수권을 박도경(朴道京)에게 위임한 뒤 장성 백암산(白巖山)에서 3∼4년 동안 부상을 치료하였다. 그 뒤 1911년 봄 이후로 금산에 은신하며 기회를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의소일기(義所日記)』
- 『후은김선생긴담록(後隱金先生薪膽錄)』
- 『호남의병장열전』(행주기씨대종중 편)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2)
-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 『독립운동사자료집』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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