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신(金東臣, 1871~1933)은 충청남도 회덕군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표(元表), 호는 청암(淸菴)이다.
1906년 3월 26일 홍주(洪州)에서 봉기한 민종식(閔宗植)의 부하로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김동신은 민종식에게 전라도에서 기병할 것을 약속한 후 약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북도 무주군 덕유산(德裕山)에 있는 자원암(紫原庵)으로 내려와 이곳에 유진(留陣)하면서 거사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민종식이 먼저 홍주에서 기병하였지만, 그 후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으므로 김동신은 전라도를 잠행하면서 동지를 규합해갔다.
이후 1907년 고종 황제 강제 폐위와 군대해산 후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김동신은 전라북도 정읍군 내장산에서 기우만(奇宇萬) · 고광순(高光洵)과 더불어 기병할 것을 의논하고 인근 부락으로 통문을 돌려 의병을 소모(召募)하고 군기(軍器)를 모아갔다.
이후 9월경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순창(淳昌)의 우편취급소와 경무고문분파소(警務顧問分派所)를 습격하여 이곳을 점령한 후 관물을 노획하였고, 남원 모래사장에서 일본군과 격전하여 2명을 사살하고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이후 9월 중순경 용담 내원사(內源寺)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석용(李錫庸)의 의진과 합진하였으나, 통수권과 전략 등의 문제로 공격해 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자 곧 해진하였다.
1908년 2월 약 1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북도 용담군 구랑(九郞)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이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전라북도 무주군 황천면 삼곡리에서 일본군과 다시 교전하였다. 3월 6일 스스로 ‘삼남의병대장’이라 칭하고, 8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남도 거창군 매학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처럼 전라도 ·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병을 얻어 고향인 충청남도 회덕군 탄동면 덕진동에서 치료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1908년 6월에 체포되었다. 8월 1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내란죄로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다년간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追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