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

근대사
인물
을미사변 이후 대한제국 강제 병합 이전까지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의병장.
이칭
명옥(鳴玉)
벽산(碧山)
이명
김도현(金燾鉉)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2년
사망 연도
1914년
본관
김녕(金寧)
출생지
경상북도 영양군
주요 경력
선성의진 중군장|강릉의진 선봉장
대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1962)
관련 사건
을미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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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도현은 을미사변 이후 대한제국 강제 병합 이전까지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을미사변 직후에 안동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고, 다른 의병 부대가 해산된 뒤인 1896년 10월까지 항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저항하여 상소 투쟁을 하였고, 1907년 2월에 의병 활동을 조직하다가 수감되었다. 1914년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정의
을미사변 이후 대한제국 강제 병합 이전까지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의병장.
인적사항

김도현(金道鉉, 1852~1914)은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신이다.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명옥(鳴玉), 호는 벽산(碧山)이다. 소년기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모두 통독(通讀)하였다.

주요 활동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의병을 일으켰다. 일족들과 함께 검산(劒山)에 본거지를 두고 청량산(淸凉山)에서 모병(募兵)하였다. 이 무렵 유시연(柳時淵) · 권세연(權世淵) 등의 의진이 안동(安東) 일대에 집결하여 안동 입성을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 합세하였다.

1896년 1월 13일(양력 2월)에 안동부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안동부에 입성한 의진에서는 안동 도총(安東都摠) 김도화(金道和)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영천(영주)에서 김우창(金禹昌), 영양에서 조승기(趙承基), 진보에서 허훈(許薰)이 일어나 진영을 형성하였다.

김도현은 청송(靑松) · 의성(義城) · 영덕(盈德) · 영해(寧海)를 순방하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선성(宣城) 진영의 중군장이 되었다. 원래 중군장인 김석교(金奭敎)가 제천 의진의 서상렬(徐相烈)의 부대로 옮겨가면서 그 후임에 앉은 것이다.

이후 상주 태봉(胎峯)의 일본군 기지를 공략하다 실패한 후 안동 일대의 의병 진영이 크게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김도현의 의진은 이후 독립부대로 활약하게 되어 그해 10월 15일(음력 9월 9일) 영양군 청기면 여미리(余味里)에서 해산할 때까지 민용호(閔龍鎬)의 초청을 받아 강릉에 갔던 때를 제외하고는 경상북도 동북부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폈다.

을미의병은 대부분 친일 내각의 퇴각, 단발령의 철회 등으로 1896년 5월경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도현은 10월 15일까지 항전함으로써 이 시기 의병장 중에서 가장 오래 투쟁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김도현은 김상종(金象鍾) 등과 앞장서 주선하여 선성(宣城)에 모인 후 각 고을에 통문을 보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가서 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도현은 서울에서의 투쟁을 멈추고 귀향하였다.

1906년 4월에 삼남 지방 사람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재차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활동을 사방으로 전개하였다. 일을 은밀하게 진전시키던 중 일제에 의해 사전 발각되어 1907년 2월에 체포되었다가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1909년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1914년 부친의 사후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기려수필(騎驢隨筆)』
『벽산선생창의전말(碧山先生倡義顚末)』

논문

권영배, 「碧山 金道鉉(1852~1914)의 義兵活動과 蹈海殉國」(『朝鮮史硏究』 20, 조선사연구회, 2011)
권영배, 「遺文을 통해 본 碧山 金道鉉의 義兵抗爭」(『歷史敎育論集』 23 · 24, 역사교육학회, 1999)
김강수, 「韓末 義兵將 碧山 金道鉉의 義兵活動」(『북악사론』 2,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1990)
김정미, 「韓末 慶尙道 寧海地方의 義兵戰爭」(경북대학교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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