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이명은 봉율(鳳律)이다. 전라남도 나주 출신으로 강맹수(姜孟秀)의 아들이다.
1907년 군대해산 후 함평군 신광면에서 심남일(沈南一)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후군장으로 활약하였다. 이어서 선봉장 강무경(姜武景)과 격문을 작성, 살포하여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다. 1908년 3월강진군 오치동전투에서 일본군 수백명과 접전하여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 해 6월 능주전투에서, 10월 해남성내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5월 보성군 천동에 주둔, 보성의병장 안규홍(安圭洪)에게 통지하여 석호산(石虎山)에서 회동, 서로 협조할 것을 의논하였다.
그 뒤 일본군 50여 명과 접전 끝에 적 5명을 사살하였다. 그 해 8월 심남일 의진이 석정(石井)에서 적과 접전할 때, 첩자가 능주 일본헌병대에 밀통함으로써 적의 야습을 받아 많은 의병을 잃었다. 그 뒤 칙령에 의하여 의병을 해산하고 풍치(風峙)에 피신해 있던 중 붙잡혔다.
1910년 4월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투옥중, 일본관헌의 고문으로 발목 불구가 되었다. 출감 후 나주군의 독립운동에 은밀히 참여하였다.
1983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