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달주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심남일 의진에서 후군장으로 활약하다 투옥되었으며, 출감 후 나주군의 독립운동에 은밀히 참여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0년(고종 17)
사망 연도
1960년
본관
진주(晉州)
출생지
전라남도 나주
정의
대한제국기 때, 심남일 의진에서 후군장으로 활약하다 투옥되었으며, 출감 후 나주군의 독립운동에 은밀히 참여한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이명은 봉율(鳳律)이다. 전라남도 나주 출신으로 강맹수(姜孟秀)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군대해산 후 함평군 신광면에서 심남일(沈南一)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후군장으로 활약하였다. 이어서 선봉장 강무경(姜武景)과 격문을 작성, 살포하여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다. 1908년 3월강진군 오치동전투에서 일본군 수백명과 접전하여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 해 6월 능주전투에서, 10월 해남성내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5월 보성군 천동에 주둔, 보성의병장 안규홍(安圭洪)에게 통지하여 석호산(石虎山)에서 회동, 서로 협조할 것을 의논하였다.

그 뒤 일본군 50여 명과 접전 끝에 적 5명을 사살하였다. 그 해 8월 심남일 의진이 석정(石井)에서 적과 접전할 때, 첩자가 능주 일본헌병대에 밀통함으로써 적의 야습을 받아 많은 의병을 잃었다. 그 뒤 칙령에 의하여 의병을 해산하고 풍치(風峙)에 피신해 있던 중 붙잡혔다.

1910년 4월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투옥중, 일본관헌의 고문으로 발목 불구가 되었다. 출감 후 나주군의 독립운동에 은밀히 참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홍영기, 일조각, 2004)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홍순권,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독립운동사자료집』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조선독립운동』Ⅰ(김정명 편, 원서방, 1967)
집필자
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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