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본명은 강기주(姜基周). 서울 출신.
1907년 대한제국군 기병부위(騎兵副尉)로 있다가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군을 규합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그 뒤 일본헌병대를 찾아가 위장 귀순하여 장단 고랑포 일본헌병보조원으로 종사하였다. 이 때 각지의 의병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거사 기회를 노렸다. 당시 헌병대에는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10여 명의 동지와 많은 포로의병들이 있었다.
강기동은 숙직을 기해 이들을 석방하고 무기 및 탄약을 탈취하여 의병운동을 재개하였다. 의병활동 지역은 경기도 포천·양주 등지와 강원도 금성(지금의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회양·통구 등지로 규모는 100명 내외였다.
1908년 3월에 의병장 이은찬(李殷瓚)이 서울탈환작전에 실패하여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하여 강원호(姜元浩)·남학서(南鶴西)·오수영(吳壽泳)·임명달(任明達) 등과 더불어 결사토적할 것을 맹약한 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1908년 겨울에는 창의한북대장(倡義韓北大將) 연기우(延基羽) 의진과 합세하여 200여 명의 의진을 거느리고 포천 송우(松隅)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수일 후 그 곳에서 일본헌병대와 교전하던 중 왼쪽다리에 적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연기우 의진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했다.
일본헌병사령부는 강기동을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 500원을 걸고 체포에 열을 올렸다. 1911년 2월 12일원산에 나타나 일본인이 경영하던 오처루(吾妻樓)에서 술을 마시다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그 해 2윌 17일에 서울로 이송, 경무총감부에 수금되었는데 팔다리에 태극기와 극기(克己)라는 글자를 묵자하고 옥중항쟁을 하다가 용산 일본군 행형장에서 총살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