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영기(泳琪, 泳祺).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안(京安), 호는 정재(貞齋). 전라남도 광산 출신. 윤석준(尹錫峻)의 아들이다.
1906년 7월에 고광순(高光洵)을 찾아가 전라남도 창평에서 거의하여 호군으로 추천되었다.
병력을 강화하고자 광주에 나와 해산군인 40여명을 모으고, 전라남도의 순천·석곡 등지에서 병력 및 무기를 증강하며 왜적과 싸우면서 광양에 이르렀다. 1907년 구례로 행군하기에 앞서 고광순이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화개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산포수(山砲手) 수백명을 거느리고 함양의 소정(小井)·백모(白毛) 두 산골짜기에 이르러 전력을 강화하며, 60명이 넘는 강화의 해산군인과 합세하였다. 1908년 화개로 진군하다가 의신동에서 접전하여 30여명의 적을 섬멸하였다.
다시 운봉과 함양·엄천에서 적과 격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부득이 물러서게 되고 10여년을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였다.
이듬해에는 서울의 애국지사들과 연락하면서, 광주 등지에서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모금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1921년에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