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신덕순(申德淳) · 신정회(申正會), 자는 정효(正孝), 호는 몽암(蒙庵). 광주(光州) 출신. 신태수(申泰洙)의 아들이다. 일찍이 기우만(奇宇萬)과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에 뛰어났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최익현(崔益鉉)의 창의격문을 받아 동지를 규합, 기회를 엿보던 중 1907년 4월 25일 고광순(高光洵)의진이 동복(同福)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촌아우인 신상철(申相徹)과 같이 달려갔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집으로 돌아와 재거를 계획하였다.
1907년 8월 고광순의진에 입대하여 참모가 되었으며, 전라남도 창평 제심리를 중심으로 대규모 거사계획을 숙의하였다. 1907년 9월 14일 고광순의진은 신덕균의 제의에 따라 일본인이 많다고 알려진 동복읍을 습격하여 적들을 궤산시키고, 하동 화개동으로 들어갔다.
그 뒤 구례 연곡사에 본영을 정하고 의진의 부서를 개편하였는데 참모로 유임되었다. 같은 해 10월 17일 광주에 주둔하였던 일본수비대의 기습공격을 받아 대장 고광순과 부장 고광훈(高光勳)이 붙잡혔으나, 신덕균은 참모인 윤영기(尹永淇)와 소모(召募)하기 위하여 외지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하였다.
그 뒤 가산을 팔아 무기를 갖추고 의병 100여 명을 모아 재기하여 운봉 · 함양 · 순창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전라북도 순창 회문산(回文山)에서 왜군에게 붙잡혀 그해 11월 정읍 고부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