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문묘의 시설 가운데 공자의 위판을 봉안한 유교건축물.
내용
동문과 서문이 설치된 대전(大殿) 안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인 공자를 정위(正位)로 하여 안자(顔子)·자사(子思)는 동쪽에, 증자(曾子)·맹자(孟子)는 서쪽에 배치하였다.
4성(四聖) 뒷줄로 동쪽에는 민손(閔損)·염옹(冉雍)·단목사(端木賜)·중유(仲由)·복상(卜商)·주돈이(周敦頤)·정이(程頤)·장재(張載)를 앞줄에, 설총(薛聰)·안유(安裕)·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은 뒷줄에 종향(從享)하였다.
서쪽으로는 염경(冉耕)·재여(宰予)·염구(冉求)·언언(言偃)·전손사(顓孫師)·정호(程顥)·소옹(邵雍)·주희(朱熹)는 앞줄에, 최치원(崔致遠)·정몽주(鄭夢周)·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김인후(金麟厚)·성혼(成渾)·조헌(趙憲)·송시열(宋時烈)·박세채(朴世采)는 뒷줄에 종향해, 공자를 비롯한 이른바 5성(五聖)·10철(十哲)·송조6현(宋朝六賢)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판을 봉안하고 봄·가을로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있다.
1530년(중종 25) 소상(塑像)을 철거하고 목주(木主)로 대용하였다. 현존하는 공자의 위판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가 환안(還安)한 역사가 있다. 원나라의 무종(武宗)이 대성(大成)이라 추시(追諡)하고, 1104년인 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에 벽옹문선왕전(辟雍文宣王殿)을 대성전이라 한 뒤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참고문헌
- 『공자통기(孔子通紀)』
- 『사해(辭海)』
- 『태학지(太學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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