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거화(去華)·일우(一宇)·태초(太初), 호는 몽암(蒙菴)이다. 뒤에 예안백(禮安伯)에 봉해져 예안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1268년(원종 9) 과거에 급제해 광주참군(廣州參軍)이 되고, 뒤이어 국학학정(國學學正)이 되었다. 충렬왕 초에 첨의사인 우부승지(僉議舍人右副承旨)를 거쳐 1292년(충렬왕 18) 부지밀직사사 문학학사승지(副知密直司事文學學士承旨)가 되었으며, 1294년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거쳐 이듬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296년 도당(都堂)에서 당시의 폐단을 상언(上言: 임금에게 글을 올리는 것)한 것으로 왕의 노여움을 샀는데, 그 발의자로 혐의를 받아 옥에 갇혔다가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지밀직사사 세자원빈(知密直司事世子元賓)이 되었고, 1298년 관제 개혁에 따라 검교사공 서경유수 평양부윤(檢校司空西京留守平壤府尹)이 되었으며, 밀직사사 전조판서 집현전대학사 수국사(密直司事銓曹判書集賢殿大學士修國史)가 되었다.
1299년 다시 파직을 당했으나 1303년 지밀직사사로 기용되어 이듬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고, 이어 1307년에는 도첨의찬성사 판판도사사(都僉議贊成事判版圖司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해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가서 그 곳에 있던 충선왕과 밀직·중방(重房)· 시(內侍)·삼관(三官)·오군(五軍)을 모두 폐지한다는 내용의 관제 개혁을 결정하고 돌아왔다. 1308년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즉위하자 대사백(大詞伯)에 봉해지고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에 녹훈되었다.
그러나 관제 개혁으로 실직당한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받아오던 중 숙비(淑妃)의 미움을 받아 회주(淮州)·예주(禮州) 등지의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소환되어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였다.
성품은 너그럽고 후했으나 청렴하지 못해 전선(銓選)으로 있을 때 뇌물로 재산을 모았으며, 빈객을 좋아하고 거문고와 바둑을 즐겼다. 또 시문에 능해 장단구 몇 편이 세상에 유행했으며, 영해에 귀양 갔을 때 지은 「무고(舞鼓)」가 『악부(樂府)』에 전한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