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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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두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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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여러 가지 규약에 따라 바둑판 위에 바둑돌을 한 점씩 서로 번갈아 놓고 경기의 끝 판에 이르러 각자가 차지한 ‘집’의 수효를 계산하여 승부를 가리는 민속놀이. 경기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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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두 사람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여러 가지 규약에 따라 바둑판 위에 바둑돌을 한 점씩 서로 번갈아 놓고 경기의 끝 판에 이르러 각자가 차지한 ‘집’의 수효를 계산하여 승부를 가리는 민속놀이. 경기놀이.
내용

바둑이라는 말은 한자 ‘위기(圍碁)’와 순수한 우리말인 ‘바돌’·‘바독’·‘바둑’ 등으로 불리는데, 광복 후부터 ‘바둑’으로 통일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둑은 학술적이면서도 예술적이며, 나아가서 심적인 3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바둑은 각자의 성품과 도량을 표현하며, 바둑 한 판에서 발생하는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은 마치 인생의 여정과 흡사하여 인격수양에도 도움을 준다. 바둑판은 가로·세로 각기 19줄의 등격평행선(等隔平行線)을 그린 평면(平面)판으로서 보통 세로 45.5㎝, 가로 42.5㎝ 정도의 나무판을 표준으로 한다.

그러나 이 표준크기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도 경기하는 데는 상관이 없다. 바둑판의 재료는 일반적으로 나무를 사용한다. 나무의 종류는 비자(榧子)가 최고이지만 구하기가 어려워 요즈음 주로 수입목을 사용한다. 그러나 헝겊이나 종이에 19×19선을 그려 사용하여도 경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바둑돌은 흑색과 백색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아무 색이나 두 가지 다른 색깔만 사용하여도 상관이 없다. 바둑돌의 재료는 보통 흑색인 돌과 백색인 조개껍질을 이용한다. 요즘은 보통 유리제품이 많다.

경기방법은 여러 가지 규약(規約)에 따라 바둑돌을 바둑판 위에 한점씩 서로 번갈아 놓아서 승부를 겨룬다. 승부는 경기의 끝 판에 규칙이 정하는 데에 따라, 각자가 차지한 집의 수효를 계산하여 그 수효가 더 많은 쪽이 이긴 것으로 판정한다.

‘집’의 수효를 계산하는 일을 계가(計家)라고 한다. 계가를 한 뒤에 승부판정을 내릴 때는 ‘갑이 1집 이겼다.’, ‘을이 5집 이겼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계가에 이르기 전에 어느 한쪽이 스스로 졌음을 인정하고 물러날 경우 당연히 그 상대방이 이기게 되며, 이러한 경우를 불계승(不計勝: 계가하지 않고 이김)이라고 한다.

바둑의 단위(段位)는 마치 공무원이나 군인의 계급과 비슷하다. 다만, 전문기사에게 붙는 단위는 경력이나 연공 따위는 고려되지 않고 오직 승단시합 규정에 따라서 승단(昇段)된다.

단위는 초단(初段)부터 시작하며 구단(九段)이 최고 높은 단위이다. 이 단위제도는 약 300여년 전부터 있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광복 후에 제정되었다. 또, 일반 아마추어의 단위도 있다. 아마추어 단위에도 어느 정도의 규정은 있으나 대체로 실력 정도에 맞추어 인허해주고 있다.

바둑의 유래는 매우 오래이다. 문자가 생기기 이전인 4,300여년 전에 발생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고증은 없다. 옛날 하(夏)나라 걸왕(桀王)이 석주(舃胄)에게 명하여 만들었다고 하고,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아들의 지혜를 계발해주기 위하여 바둑의 오묘한 술수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바둑판의 구조가 『주역(周易)』의 이치와 상통하므로 바둑의 기원이 『주역』의 발생과 때를 같이 하였으리라는 설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바둑이 여러 가지 무궁무진한 묘수가 있으므로 잘 배우기만 하면 그 오묘한 이치를 터득할 수 있다고 하여 전해져 내려오는게 아닌가 싶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고대 중국에서는 17×17=289로(路) 바둑판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19×19=361로 변하였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다만, 바둑책으로 가장 오래된 『현현기경(玄玄棋經)』에 의하면 107년경에는 19로이었음을 밝히고 있으니, 17로의 바둑판은 근 2,000년 이전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론될 뿐이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요순시대에 바둑이 창안되었다면 단군과 요순은 그 연대가 비슷하므로, 그 당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바둑사는 삼국시대부터 더듬어 볼 수 있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는 바둑·투호의 유희를 좋아한다”고 하였고, 또 『후한서(後漢書)』에는 “백제의 풍속은 말타고 활쏘는 것을 중히 여기며, 역사서적도 사랑한다. 토호·저포와 여러 유희가 있는데 더욱 바둑두는 것을 숭상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에 개로왕(蓋鹵王)과 고구려 첩자 도림(道琳)과 연관된 설화에는 바둑을 즐긴 개로왕 때문에 백제의 내정이 어지러워진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통일신라에 와서도 바둑이 상당히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제34대 효성왕 2년(738) 봄에 당나라에서 선왕인 성덕왕의 부음을 듣고 조문사절단을 보낼 때 당나라 현종은 문장가인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형숙(邢璹) 사절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로서 글을 잘 아는 것이 중국과 유사하다. 경이 큰 선비이기 때문에 특별히 사절로 보내는 것이니, 가서 경서의 뜻을 잘 설명하여, 대국의 유교가 왕성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라. 그리고 신라 사람들은 바둑을 잘 둔다고 하니 특별히 바둑 잘 두기로 유명한 병조참군 양계응(楊季膺)을 부사로 대동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양계응이 우리나라에서 바둑을 둔 전적에 대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記) 중에는 다만 “우리나라 바둑 고수자들이 모두 그이보다 하수였다”라고만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또, 이 무렵 우리나라 기사(棋士)로서 당조(唐朝)에 들어가서 바둑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있었다. 헌강왕 때 박구(朴球)라는 사람이 중국 희종(僖宗)의 기대조(棋待詔: 황제의 바둑비서)를 지내다가 귀국할 때 중국의 유명한 시인 장교(張喬)는 다음과 같은 전별시를 지어 박구의 고수를 찬양하고 있다(삼국사기).

“바다 건너 저 나라에 그대 적수 뉘 있으리, 본국이라 기쁘지만 바둑수는 외로우리, 궁중 임 뫼신 자리엔 새로운 형세 전할 것이, 뱃전에서 판을 대하여도 옛날 기보 엎어 놓으리(海東誰敵手 歸去道應孤 闕下傳新勢 船中覆舊圖).” 당시 양국간의 바둑교류의 성황을 알 수 있는 말들이다. 이 바둑은 통일신라를 거쳐 그대로 고려·조선 시대로 계승되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호협한 왕자들이 유희를 좋아하는 풍조가 있어서 바둑도 역시 많이 유행되었을 것이다.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장기·바둑 등 유희물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도 세력을 쥐고 있던 시절에 바둑을 즐기면서 한가로운 때를 보냈다고 한다. 전국에서 명수들을 초청하여 바둑을 두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바둑의 명수들이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광복 전까지 순장(順丈)바둑이라는 재래식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 순장바둑은 어느 때부터 두기 시작하였는지 문헌으로 기록된 것이 없어서 알 수가 없다. 이 순장바둑은 대국하기에 앞서 각기 8점씩 모두 16점을 일정한 곳에 두어 초석(草石)을 끝낸 상태에서 두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 순장바둑은 초석으로 말미암아 창의성을 제한하고, 기술적인 면에서 한계가 있어 광복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광복 바로 뒤 바둑인구는 남북 합쳐서 약 3,000명 정도로 추산되었으나, 1989년 현재에 이르러서는 약 500만 명에 육박된다. 따라서 신문에 바둑연재가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중앙지·지방지·월간지·TV에 모두 타이틀전이 연중무휴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 바둑계의 총본산인 재단법인 한국기원(韓國棋院)은 94명의 전문기사를 포용하고 있다. 또한 500만 아마추어 바둑애호가를 위한 각종대회를 주관하고, 동시에 국제교류도 주관하고 있다. 아마추어의 전국 규모의 대회는 여섯 종목이 있다.

또, 어린이 바둑대회와 중·고·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바둑대회가 4종이 있고, 프로기사의 세계대회도 4종이 있다. 전문기사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매년 2회 전문기사 입단시합도 실시하고 있다.

참고문헌

『바둑의 첫걸음』(조남철, 법문사, 1982)
『한국민속대관』 4(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현현기경』(김인교 역, 현현각,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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