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은 일제강점기 국가권력인 일제에 저항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하고자 한 운동이다. 압박받고 지배당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노동과 자본이란 생산관계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국가권력 등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며 절대 자유가 행해지는 사회를 추구한 해방운동이다. 사회주의 계열과는 자본주의 비판에 공조하면서 러시아 공산주의의 당 중심의 볼셰비즘에 비판적이었다. 전시 체제기에 들어가면서 중국 관내에 거주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주의 계열과 공동전선을 도모하였다.
무정부주의를 의미하는 아나키즘(Anarchism)의 어원은 ‘지배자가 없음’을 의미한다. 전통시대에도 권력과 권위에 저항하는 사상이 존재하였지만,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에 저항하는 사상의 하나로 근대 아나키즘이 생겨났다. 서양에서 소개된 아나키즘을 일본에서는 무정부주의로 번역했는데, 이러한 번역어는 ‘정부가 없다’라는 뜻에서 비롯되듯이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의도가 반영되었다. 그렇지만 당대 아나키스트들도 스스로 무정부주의자라고 불렀다.
무정부주의 이념과 사상은 1900년대에 중국과 일본을 통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대에 러시아혁명(1917)과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 전쟁에 반대하고 세계 평화 방안을 모색한 개조론(改造論)의 대두로 인해 사회주의 사상과 함께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점은 일치하나, 무정부주의자들은 러시아 볼셰비즘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과 달리 당(黨) 중심의 권력 집중에 반대하였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인의 무정부주의운동은 일제(日帝)에 반대하는 반제 · 반자본 운동과 함께 반볼셰비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에 일어난 3 · 1 운동 이후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1920년대 초에 결성된 대표적인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에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스스로 힘으로 자신의 의식을 해결하는 동시에, 애정으로써 호상부조(互相扶助)하여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며 공동의 번영을 꾀” 하는 것을 주지(主旨)로 삼았다. 그리고 “정복 민족과 피정복 민족이 없는 세계, 특권계급과 노예계급이 없는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 노동공제회의 기관지인 『공제(共濟)』를 비롯해서 『 신생활』, 『아성(我聲)』 등의 잡지에 무정부주의를 선전하는 글이 많이 게재되었다. 공산주의가 적색(赤色)을 부각하였다면 무정부주의는 흑색(黑色)을 강조하였다.
1923년 1월에 서울에서 “현재 모순 많은 생활을 버리고 평생의 일거일동을 자유스럽게 참사람답게 일반이 이상(理想)하는 곳으로 가기를 실행하자.”라는 취지에서 흑로회(黑勞會)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회원을 늘려 조직 확대를 도모하고 무정부주의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에서의 무정부주의 수용은 한국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유학생들은 일본인 무정부주의자인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등과 교류 관계를 맺었다. 1914년 9월에 오사카〔大阪〕에서 조선인 무정부주의자가 주도한 조선인친목회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무정부주의자 정태신(鄭泰信)이 주도하였고, 매월 30여 명의 단원이 참여하는 모임을 1916년 5월까지 이어갔다.
조선인친목회는 본격적인 무정부주의운동 단체가 아니었지만, 사상 선전을 위해 조직된 단체로 평가된다. 또한, 1920년 1월에 무정부주의에 입각해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옹호하는 선인노동민우회(鮮人勞動民友會)가 결성되었다.
1921년 11월에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黑濤會)가 결성되었다. 간사로 김약수, 박열, 서상일(徐相一), 원종린, 정태신, 조봉암, 황석우 등이 선출되었다. 이 단체는 1922년 4월 고학생동우회와 연합하여 친일 세력이 주도한 ‘참정권운동’에 반대하는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1922년 7월에 박열(朴烈)이 주도해서 기관지 『흑도』를 발행해서 무정부주의를 선전하고, 일본 니카타현〔新瀉縣〕에서 일어난 ‘한국인 노동자 집단학살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와 항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사회주의자와의 분화 과정에서 흑도회가 해체되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1922년 9월에 흑우회(黑友會)를, 사회주의자들은 북성회(北星會)를 결성하였다. 양자 사이에는 노동자 조직을 결성하는 데서 차이가 존재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주장하였던 것에 비해 무정부주의자들은 ‘현재 노동하고 있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자유로운 자율적 · 자주적 결속을 주장하였다.
흑우회에는 김중한 · 박열 · 이필현 · 정태성 · 홍진유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식민지 조선인을 부정적으로 부른 불령선인(不逞鮮人)과 발음이 같은 잡지 『불령선인[太ぃ鮮人]』을 발행하였다.
박열은 1923년 9월 간토대지진〔關東大地震〕 이후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검거되었다. 박열과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사형선고를 받은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였다. 그런데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변사(變死)해서 일본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박열은 22년 뒤 1945년 10월 맥아더사령부에 의하여 석방되었다.
이후 침체되었던 재일본 무정부주의자의 활동은 1924년부터 다시 일어났다. 장상중 · 정태성 · 최규정 등은 일본 무정부주의 단체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흑우회의 활동이 재기되었다. 1926년 2월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회원 규합과 무정부주의 선전에 관해 협의하여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정하였다. 그 후 1926년 7월 기관지 『흑우』와 팸플릿 「소작운동」 등을 발행하였다.
흑우회는 1926년 7월 해체하였다. 곧이어 같은 해 11월 “자유연합주의를 고창한다, 피정복자 해방은 그 자신의 힘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흑색전선연맹을 조직하였다. 이후 1927년 2월에는 흑풍회(黑風會)로 개칭하였다.
흑풍회는 기관지 『자유사회』를 발행하고, 원심창 · 이홍근 · 장상중 등으로 선전대를 편성하여 조선인 노동자들의 합숙소를 순방하면서 잡지를 배부하였다. 이후 흑풍회는 1928년 1월 흑우연맹으로 개칭하고, 기관지 『호조운동(互助運動)』을 발간하였다.
오사카에서도 무정부주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춘식 · 김태엽 등은 1926년 1월 “민족을 위하고 민족의 진정한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신진회(新進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희소식』을 발행하였다.
재일본 무정부주의자들은 선전 활동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합동으로 기관지를 발행하고자 하였다. 1930년 8월 이문열(李汶烈) 등의 조선동흥노동동맹(朝鮮東興勞動同盟)과 원심창 · 한하연 등의 흑우연맹이 함께 제작한 『 흑색신문(黑色新聞)』이 창간되었다. 이 신문의 발행 비용은 재일본 아나키스트 단체와 노동조합 등이 함께 부담하였다.
1930년 8월 1일자 창간호에서 파시즘이 국민들을 호도하기 위해 전개하였던 논리였음을 비판하였다. 제37호까지 발행된 이 신문은 1935년 4월 폐간되었다. 개인적 차원에서 전한촌(全寒村)은 1933년 9월 『토민(土民)』을 발행하였고, 홍성환과 한하연은 자유콤뮨사를 설립하고 1932년12월 『자유콤뮨』을 발행하였다.
국내의 무정부주의운동은 일본에 거주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이 귀국하면서 다시 활발히 일어났다. 흑기연맹(黑旗聯盟)은 흑우회의 후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본에서 귀국한 무정부주의자들이 조직 결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대역사건’ 관련자였던 서상경 · 홍진유 등이 예심에서 석방된 뒤 귀국하였다. 이들은 1924년 12월부터 조직 결성을 추진하다가 1934년 4월에 발기회를 개최하고 흑기연맹 결성을 도모하였다.
흑기연맹은 “오인(吾人)은 자유 평등을 유린한 일본 정치경제 조직을 근본부터 파괴한다.”라는 강령을 제정하고 「우리의 주장」이라는 취지서를 작성하였다. 흑기연맹은 1925년 ‘전선(全鮮)아나키스트대회’의 개최를 준비하다가 같은 해 4월 말 일제 경찰에 조직원들이 검거되었고, 대부분의 조직원은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또한 1925년 9월 대구에서 김대산 · 방한상 · 신재모 · 정명준 · 하종진 등이 진우연맹(眞友聯盟)이라는 무정부주의자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일본과 중국에 거주하던 무정부주의자와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이들은 자금을 확보하여 주요 관공서를 대상으로 한 파괴 활동을 전개하고자 계획하였다. 그러다가 1926년 6월경부터 진우연맹 회원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3명이 기소되었다.
한편 대구 출신의 무정부주의자 윤우열은 1925년 12월에 「파괴의 투탄을!」이라는 제목 아래 허무당(虛無黨) 선언서를 작성해서 서울 시내 신문 · 잡지사와 사회운동 단체 등에 배포하였다. 이 선언서에서 현재의 식민지배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폭파 · 방화 · 총살의 직접 행동만이 있을 뿐이라면서, 허무당을 조직하여 폭력으로써 혁명을 완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윤우열은 1926년 1월 종로경찰서에 의해 체포되었다.
1929년에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김호구(金豪九) 등을 중심으로 흑전사(黑戰社)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활동하였던 무정부주의자였는데, 고향으로 돌아와서 관청에서 농민들에게 뽕나무 묘목을 강제로 배부하고 돈을 걷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농민들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같은 해 6월 단오절 씨름대회를 틈타 「농민에 고함」, 「일반 민중에 고함」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살포하였다.
이 격문에서 총독정치의 억압과 착취를 폭로하고 농민이 단결하여 강권(强權) 체제 타도를 호소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잡지 『흑전』이 발각되고, 7월 중순에 관련자 30여 명이 체포되었다. 형량은 김호구 징역 5년, 오병현 징역 3년 6개월, 이지활 징역 2년 6개월, 김양복 · 송주식 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에 처해졌다.
경상남도 지방에서도 무정부주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마산에서는 김형윤을 중심으로 한 그룹이, 창원에서는 조병기 · 손조동을 중심으로 하는 흑우연맹이, 진주에서는 정태성 등이 결성한 조직이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1927년 3~4월 무정부주의운동 조직이 결성되었다. 강기찬 · 고병희 · 김형수 · 조대수 등은 단체를 조직하여 무정부주의를 연구 · 선전하고, 이를 통해 무정부주의 사회 건설을 촉진하고자 하였다. 독서회를 조직하고 매월 1회 회합하여 공동연구하면서 회원을 규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1929년 5월 조합원의 생활 향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우리계라는 조합을 조직하였는데, 실제로는 무정부주의 연구와 선전에 주력하였다. 1930년 7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병희는 징역 5년, 조태수 · 고영희는 징역 4년, 강기찬 · 김형수는 징역 3년에 처해졌다.
강원도 철원과 경기도 이천에서 1927년 여름 이은송을 중심으로 청소년운동 단체의 간부를 망라한 자유회(自由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표면적으로는 농촌 문화를 향상시키는 것을 표방하였지만, 무정부주의 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를 지향하였다. 1928년 봄, 조직이 발각되어 윤용화 · 이영하는 징역 4년, 이은송 · 김순조는 징역 3년에 처해졌다.
서상경 · 서정기 등 흑기연맹에 관계하였던 무정부주의자들은 1929년 2월 충주에서 문예운동사(文藝運動社)를 조직하였다. 문예운동사는 표면적으로는 문예잡지 『 문예운동』을 간행할 계획을 세웠으나, 내부적으로는 무정부주의를 선전 · 고취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무정부주의는 “인류는 모두 평등하며 절대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 현재의 국가 조직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등이었다. 같은 해 5월에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관계자가 체포되었다. 권오돈 · 김학원 · 서상경 · 서정기 · 안병규 · 정진복 등은 각 징역 5년, 김현국은 징역 2년에 처해졌다.
1920년대 후반부터 국내 무정부주의자들의 주도 아래 노동단체가 결성되었다. 1927년 9월 김연창(金演彰) 등은 원산에서 노동자자유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강령에서 경제적 직접 행동론을 채택하고, 노동자 자신에 의한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강조하였다. 원산 지방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이외에도 원산일반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노동자들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평양에서는 1928년 12월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가 결성되었다. 창립 대회에서는 최갑룡(崔甲龍)이 서기로, 이홍근(李弘根)이 상무간사로 선출되었다. 이 단체는 “우리는 중앙집권주의와 강권주의를 배격하고 자유연합주의를 강조한다. 우리는 빈천 계급의 완전한 해방을 기한다.” 등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 단체는 대중단체를 조직하고, 일본 무정부주의 단체와의 연대를 도모하였다. 또한 기존의 노동조합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은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의 영향을 받아 무정부주의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한 예로 신채호(申采浩)는 1913년 무렵 중국인 무정부주의자의 글을 읽고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의 ‘상호부조론’을 이해하였다. 중국에 거주하던 한국인 무정부주의자들은 의열단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실천 활동에 참여하였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에 김원봉을 단장으로 만주 지린〔吉林〕에서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혁명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폭력이며, 파괴는 곧 건설”임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고유의 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식민 통치를 파괴해야 하고, 한국 민중이 자유 민중이 되기 위해서는 총독과 같은 특권 계급을 타파해야 하며, 민중은 소수 귀족의 속박 · 철쇄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베이징〔北京〕으로 본거지를 옮겨 본격적인 암살과 시설물 파괴 등의 의열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에 거주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중국인과 연합하여 아나키스트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1920년 봄 상하이〔上海〕에서 러시아인 · 중국인과 함께 삼이협회(三二協會)를 결성하였다. 앞의 ‘삼’은 ‘무정부 · 무종교 · 무가정’을, 뒤의 ‘이’는 “자기의 장처(長處)와 본능에 실제로 가까워짐”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 단체는 『크로포트킨』이란 제목의 아나키즘 선전 책자를 중국인과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배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일제가 크게 두려워할 정도로 의열단의 민족운동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개인 차원의 테러 활동은 일제 권력에 큰 타격을 주기는 어려웠고, 대중운동에 기초한 투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의열단에서는 신채호에게 의열 투쟁의 명분과 정당성을 이론화시켜 줄 것을 의뢰하였다. 신채호는 1924년에 「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해서 “민중의 직접 행동에 의한 사회혁명”을 주장해서 의열단 활동이 민족운동의 중요한 방략임을 천명하였다.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의 논쟁이 점차 가열되면서, 1924년 이후 민족주의자 · 무정부주의자 · 사회주의자로 분열되었다. 중국에 거주하는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사이에 민족운동 노선과 방략이 분화되었다. 백정기 · 이을규 · 이정규 · 이회영 · 정화암 등은 1924년 4월 베이징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로서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간하였다.
이 단체는 무정부주의를 선전하며,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양자를 비판하였다. 전자에 관해서는 파벌주의적 경향을 극복할 것을, 후자에 관해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비판하였다. 이후 이회영은 베이징에서 국내와의 연락을 맡고, 백정기 · 이을규 · 이정규 등은 상하이로 옮겨 갔다.
한편 1924년 베이징에서는 유기석(柳基石)을 중심으로 하는 무정부주의 그룹이 결성되었다. 그는 1924년 10월경 중국 무정부주의자들과 함께 흑기연맹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1925년부터 기관지 『동방잡지(東方雜誌)』 등을 발행하여 무정부주의를 선전하였다. 1927년 9월 조선 · 타이베이 · 베트남 · 일본 · 중국 · 필리핀 등 동아시아 무정부주의자들의 국제적 연대인 무정부주의자동방연맹(無政府主義者東方聯盟)이 조직되었다.
신채호는 이 단체의 창립 대회에 참가하였고, 독립 자금을 모집하다가 1928년 5월 타이베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6월 조직을 재정비해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고, 1930년 무렵까지 치열한 의열 투쟁을 수행하였다.
1927년 국내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통일전선체인 신간회가 결성된 이후 베이징의 무정부주의자 등이 중심이 되어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연맹 주비회가 구성되었다.
1928년 3월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은 각 지방 대표의 의견을 수렴해서 “일제 조직은 자유연합조직 원리에 기본할 것, 운동은 오직 직접 방법으로 할 것” 등의 강령을 제정하였다. 이 단체는 1928년 6월부터 기관지 『탈환』을 한 · 중 · 일 세 나라의 언어로 발간하고, 이를 한 · 중 · 일은 물론 만주와 타이완〔臺灣〕 등 각지에 전파하였다.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은 민족운동기지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에 윈난(雲南) 강무당을 졸업한 김종진(金宗鎭)은 1927년 10월 만주에 와서 김좌진(金佐鎭)의 신민부에 합류하였다.
1929년 7월 김종진 · 이을규 등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자유를 완전 보장하는 무지배의사회의 구현을 기한다.”, “각인(各人)은 능력껏 생산에 근로를 바치며 각인의 수요에 응하여 소비하는 경제 질서 확립을 기한다.” 등의 강령을 정하였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김좌진과 협의하여 신민부를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로 개편하였다. 이 조직의 간부는 위원장 김좌진, 부위원장 권화산 · 김종진 등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지방 조직 건설에 착수하는 한편, 학교 운영 등을 통한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9년 10월 자체 정미소를 설치하여 운영해서 중국 상인에게 피해를 입은 조선인 농민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였다. 김종진이 1931년 7월에 암살당하자 만주에서의 무정부주의운동은 중국 관내로 옮기게 되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인 무정부주의운동의 활동은 줄어들었다. 국내의 무정부주의운동은 거의 사라졌고, 일본과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아나키스트 단체도 침체기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일본에서는 중앙집권적 조직론이, 중국에서는 민족전선론이 제기되었다.
일본 내의 무정부주의운동이 민족해방전선을 계급 해방 투쟁에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전개하였다면, 중국 내의 무정부주의운동은 해방과 자주독립을 위한 통일전선을 앞세우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상하이에 거주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유기석 · 유자명 · 안공근 등에 의해 1930년 4월 결성되었다. 각종 기념일에 격문을 살포하고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 청년들에게 무정부주의를 선전하였다. 또한 일제에 협력했던 밀정을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6년 1월 상하이에서 기관지 『남화통신』을 창간하였는데, 이를 통해 민족전선의 결성을 적극 지지하였다.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한 · 중 · 일 무정부주의자들은 1931년 11월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해서 일제에 저항하였다. 이 단체는 무정부주의적 실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우선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고, 일본의 입헌군주제도 및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고, 중국과 함께 무정부주의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기관지 『자유』를 발간하고 단체 내부에 경제부 · 선전부 · 정보부 등의 부서를 설치하였다. 국제적 연대 활동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37년 9월 한국인과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들이 함께 결성한 중한청년연합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일제 말 전시 체제기에 무정부주의운동은 새로운 운동 방향을 모색하였다. 일본에서는 1933년 12월 일본인 무정부주의자와 함께 일본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이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1934년 1월 일본무정부공산당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중앙집권적 조직론과 민중독재론을 재기하였다.
국내에서는 1940년 6월 문성훈 · 이종문 · 정갑진 등의 주도로 건달회(乾達會)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무장봉기 전술을 채택하였으며, 이에 근거해서 폭력봉기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무기와 자금을 모으고자 하였다.
중국에 거주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은 모든 민족운동 세력이 결집하여 전면적 항일 전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민족전선론을 제기하였다. 유기석 · 유자명 등은 1937년 난징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선혁명자연맹으로 재편하였다.
1937년 12월 조선혁명자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과 협의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한중 연대와 함께 항일 투쟁을 위한 군대를 조직하였다.
중국에 거주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은 조선의용대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참여하였다. 유자명 등이 참여해서 설립한 조선의용대는 중국과 함께 항일 전쟁을 함께 수행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1939년 초 김동수 · 나월환 · 박기성 · 이재현 · 이하유 등이 주축이 되어 조직되었으며 이후 광복군 제2지대로 개편되었다.
이외에도 정화암의 한중합동유격대와 전시공작대와 유기석의 한교전지공작대 등이 조직되어 학도병 귀순 공작과 첩보와 선전 활동을 담당하였다. 1940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충칭으로 옮긴 뒤, 1942년 10월 유자명과 유림이 임시의정원의원으로 참여하였다.
무정부주의운동은 해방이 되자 새로운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반제(反帝) · 반강권(反强權) · 반자본(反資本) · 반볼셰비즘의 입장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8월 이후 무정부주의자들은 “새 나라의 건설에 어떻게 무정부주의를 적용할 것이냐” 하는 과제에 직면하였다.
오늘날 무정부주의는 아나키즘 혹은 자유시민연합 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이념과 사상은 정치 · 경제의 분야를 넘어서 공동체운동 · 반전평화운동 · 생태운동 · 환경운동 등의 분야까지 확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