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자동지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1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1922년 1월 19일 ‘조선공산당’의 합법적 외곽 사상단체로 서울에서 조직되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 결성된 최초의 합법적 사상단체였다. 이 단체는 청년 ‧ 노동 ‧ 농민 단체를 통일적으로 결속하는 활동을 수행하였고, ‘사회운동유지간담회’를 개최하여 정세와 정책에 관한 토론을 이끌어 나갔다. 발족 3개월 뒤인 1922년 3월 31일에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와 함께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1919년 3 · 1운동 이후 활발하게 일어난 대중운동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청년 ‧ 사상 단체들이 생겨났다. 국외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국내에 조직을 결성한 상해파(上海派)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소속되지 않은 사회주의 비밀조직이 결성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20년 3월 서울에서 15명의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비밀리에 결성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1925년 조직된 조선공산당과는 다른 단체]’이었다.
무산자동지회는 1922년 1월 19일 앞에서 언급한 ‘조선공산당’의 합법적 외곽 사상단체로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결성된 최초의 합법적 사상단체였다. 발기인으로는 김한(金翰), 백광흠(白光欽), 신백우(申伯雨), 원우관(元友觀), 윤덕병(尹德炳), 이준태(李準泰), 이혁로(李爀魯), 진병기(陳秉基) 등 19명이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기관지 『무산자(無産者)』를 발행하고자 하였으나, 일제 경찰의 발행금지 처분을 받아 실현되지 못하였다. 청년 ‧ 노동 ‧ 농민 단체를 통일적으로 결속하는 활동을 수행하였고, ‘사회운동유지간담회’를 개최하여 정세와 정책에 관한 토론을 이끌어 나갔다. 이 단체는 발족 3개월 뒤인 1922년 3월 31일 신인동맹회와 함께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