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경부(畊夫). 충청북도 청원(淸原) 출신.
어려서는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한학을 수학했으며, 서울의 측량학교 · 외국어학교와 보성전문학교 법학과를 수료하였다. 그 뒤 청주 측량학교와 서울 태극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한편 『소년(少年)』 편집에 관여하고, 신민회(新民會)와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국권 상실 뒤에는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만주에 성덕태상점(誠德泰商店)을 개설하는 등,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주력하였다.
3·1운동 후에는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는데, 신채호와 함께 이승만 노선(李承晩路線)에 반대하여 손을 떼었다. 그 뒤 만주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광한단(光韓團)에서 활약하다, 1921년 귀국하여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이어 무산자동지회 · 조선노동연맹회 · 신사상연구회 · 화요회 ·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이 때의 신백우는 사회주의자로서 1924년 공산주의운동 관계로 붙잡히기도 했는데, 1925년 출옥한 뒤에는 공산주의 계열과 손을 끊었다. 그 뒤 농촌운동과 고령신씨 문중 사업에만 열중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을 비롯해 대한독립촉성회 등을 통한 정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중반 이후부터는 대종교 사업(大倧敎事業)에 전심하였다. 1955년에 원로원참의에 뽑히기까지 교회 내의 많은 자리를 거치면서 포교에 공헌이 컸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