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경상남도 동래에서 남형우(南亨祐) · 박중화(朴重華) ‧ 서상일(徐相日) · 신백우(申伯雨) · 신팔균(申八均) · 안희제(安熙濟) 등이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이다. 단장은 남형우, 부단장은 안희제였고, 안희제는 제2대 단장이 되었다. 참가자는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청년이거나 선각자적 의식을 가진 개신 유학자들이었다. 청년 단원은 17세부터 30세 미만의 경상도 일대의 청년 8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단규(團規)」는 “단원은 반드시 피로 맹서할 것, 단명(團名)이나 단(團)에 관한 사항은 문자로 표시하지 말 것, 경찰 기타 기관에 체포될 경우 그 사건은 본인에게만 한하고 다른 단원에게 연루하지 말 것” 등 독립운동을 표방한 비밀결사임을 밝혔다. 명칭은 자료에 따라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으로도 혼용해서 나온다.
단원은 꾸준히 확충되었다. ‘ 신민회 사건’에서 체포를 면했던 김삼(金三) · 김태희(金泰熙) · 김홍량(金鴻亮) · 서초(徐超) · 임현(林玄 · 차병철(車秉轍) 등이 가입하였다. 안희제와 서상일이 만주나 러시아령에서 만났던 윤세복(尹世復) · 이시열(李時悅) · 최병찬(崔炳贊) 등이 참여하였다.
대동청년단의 활동은 서상일의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안희제의 백산상회(白山商會)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이루어졌다. 안희제는 1914년 동래를 거점으로 백산상회를 설립하였다. 서상일은 1913년 달성친목회(達成親睦會)를 재건한 뒤, 태궁상회(太弓商會)를 열고 1915년 음력 1월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인 박광(朴洸) · 신상태(申相泰) · 신성모(申性模) · 윤상태(尹相泰) 등이, 백산상회 직원인 윤병호(尹炳浩) · 윤현진(尹顯振) · 이호연(李浩然) · 최완(崔浣) 등이 이 비밀결사의 회원으로 함께 참여하였다. 인재 양성에도 적극적이었는데, 1919년 11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청소년들의 해외 유학을 통해 장차 국권 회복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조직은 대구 · 부산과 함께 만주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백산상회는 서울 · 원산 · 안동 · 봉천 등의 지점 및 연락 사무소를 통해 재만독립운동(在滿獨立運動) 단체를 지원하였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은 회사의 상업거래 형식으로 송달되어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 역할을 담당하였고, 의열단(義烈團)의 국내 연락 기관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일제에게 노출되지 않고 활동하였기에, 구체적인 조직과 활동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