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제(安熙濟: 1885~1943) 등은 1919년 3·1운동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교육 보급, 인재 양성, 민중 계몽이 급선무임을 깨달았다. 이에 장차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우수한 청년을 선발하여 국내 및 국외에 유학시킬 목적으로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설립하게 되었다.
기미육영회가 발족한지 6개월 후인 1920년 5월 회원이 43명에 이를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1920년 경제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고, 1921년 이후에는 육영사업이 원활하게 지속되지 못하였다.
기미육영회는 회원 부담금으로 국내 및 국외로 유학생을 파견함으로써 장차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매년 10명씩 유학생을 선발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1차 유학생으로 김정설(金鼎卨)·이병호(李炳虎)·이제만(李濟晩)·전진한(錢鎭漢)·문시환(文時煥)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또한 안호상(安浩相)·이극로(李克魯)를 독일, 신성모(申性模)는 영국으로 파견하였다.
기미육영회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남 각지의 유지 40여 명으로 조직되었다. 회원 부담금으로 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독일·영국 등으로 파견하여 장차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 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