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예월회(釜山例月會)는 1919년 3·1운동 이후 고양된 민족의식을 배경으로 한국인들의 사회·경제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1919년 11월 결성된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와 함께 1920년대 초 부산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운동 단체였다.
부산예월회는 부산 지역 민족 자본가들이 부산 지역민들의 교육과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회원은 40여 명 정도였고, 임원은 회장, 간사, 평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설립 당시 회장은 안희제(安熙濟: 1885~1943), 간사는 홍종희(洪鍾熙)였다. 1921년 4월 홍종희가 간사를 사임하자 김종범(金鍾範)이 간사를 맡았다. 6월 20일 임시 총회에서 평의원으로 김병규(金秉圭)·문영빈(文永斌)·김철수(金喆壽) 등이 선출되었고, 김종범은 간사로 재선되었다. 부산예월회는 1919년 10월 결성되어 1921년 말까지 활동하였다.
부산예월회는 매월 1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였으며, 사안에 따라서 임시총회를 열기도 하였다. 그 활동을 보면, 문화운동 단체로서 일제의 부당한 식민지 교육정책에 맞서 싸운 기록들이 보인다.
예컨대 일제는 1920년 11월과 12월에 「임시교육조사위원회 규정」과 「조선총독부 교과서조사위원회 규정」을 각각 발표하고, 1921년 1월 임시교육조사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식민 교육을 강화하려는 것으로, 부산예월회는 1921년 3월 12일 임시교육조사위원회에 제출하기 위한 건의안을 준비하였다. 또 같은 해 4월 24일 부산 지역 유지 100여 명이 모여 조선교육개선기성회를 조직하고, 조선총독부에 제출할 진정서를 1천 수백 명의 연서로 작성하였다. 부산예월회도 40여 명이 모여 건의서를 작성하여 조선총독부에 제출하는 등 식민 교육을 강화하려는 일제의 정책에 앞장서서 항거하였다.
부산예월회는 1920년대 전반기 부산 지역의 민족 자본가들이 문화운동 확산을 위해 조직한 사회단체로서 한국인의 교육과 산업 육성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