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무역주식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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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안희제(安熙濟)가 설립한 민족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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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안희제(安熙濟)가 설립한 민족기업.
개설

부산의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주식회사로 개편한 것이다.

연원

1911년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던 안희제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독립 전선의 실태를 목격, 구국운동(救國運動) 역시 경제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이에 1914년 9월 부산에 도착한 안희제는 동지 이유석(李有石) · 추한식(秋翰植) 등과 백산상회를 설립하였다.

자본금 13만원(圓)으로 곡물 · 면포 · 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개인 상회처럼 보였으나 이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속임수로서, 내실은 독립운동 진영간의 연락과 그 자금 공급에 목적을 두었다. 이 상회가 1919년 5월 자본금 100만원의 주식회사로 개편되었다.

기능과 역할

이 회사의 주주로 참여한 주요 인사들은 최준(崔浚) · 최태욱(崔泰旭) · 윤현태(尹顯泰) · 안익상(安翊相) · 정상환(鄭祥煥) · 강복순(姜復淳) 등으로 모두가 영남 지방 굴지의 대지주들이었다.

주요 경영진은 취체역사장 최준, 취체역 윤현태 · 안희제 · 강복순, 지배인 최준, 감사역 전석준(全錫準) · 김시구(金時龜) 등이었다.

총주식은 2만주이며 주주는 182명이었는데, 안희제가 2,500주, 최준이 1,800주, 안익상이 850주, 정상환이 640주, 이우식(李祐植)이 600주, 이종화(李鍾和)가 560주, 허걸(許杰)이 550주, 정재완(鄭在涴) 500주, 윤현태가 400주를 가지고 있었다.

사장 최준은 경주의 부호로 여러 민족기업에 손을 뻗치고 있었고, 취체역 윤현태는 동생인 윤현진(尹顯振)이 상해임시정부의 재정차장을 지냈다. 취체역 강복순은 진주의 대지주로 역시 여러 민족기업에 손을 뻗치고 있었다. 이 같이 안희제는 영남의 대지주들을 한데 모아 회사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자금을 공급하는 기관을 만들었다.

1919년 주식회사로 개편한 뒤 대구 · 서울 · 원산, 만주의 안동(安東) ·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瀋陽) 등지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해 그 활동 지역을 확대시켰으나, 회사의 수지는 항상 결손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 회사의 결손은 경영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계속해서 독립운동자금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3·1운동 이후 안희제는 남형우(南亨祐)와 윤현진을 상해로 파견하고 모든 경비를 조달해 주었다. 그러나 이 회사가 독립운동자금의 공급처라는 것을 일본 경찰이 모를 리 없었다. 결국 계속적인 수색 · 감금 · 고문 · 장부 검열 등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1927년 해산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한국기업가사(韓國企業家史)』(조기준, 박영사, 1971)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3(국사편찬위원회,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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