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명구(明九), 호는 우산(右山). 경상남도 양산 출신.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뒤 베이징[北京]·난징[南京] 등지를 왕래하며 국제 정세를 관찰하였다.
1914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 법률 공부를 계속하면서 신익희(申翼熙)·김성수(金性洙)·장덕수(張德秀)·송진우(宋鎭禹) 등과 조국광복동맹결사단(祖國光復同盟決死團)을 조직,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안희제(安熙濟)와 비밀 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서 활동하는 한편, 고향 양산에 의춘학원(宜春學院)을 설립하여 후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지사 수십 명과 교유하면서, 그 곳에서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이회영(李會榮)·노백린(盧伯麟)·여운형(呂運亨)·신익희 등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정 문제 해결에 힘썼으며, 미국 선교사를 통해 고향에 있던 사유재산 30만 원을 임시정부에 헌납, 재정 압박을 다소 완화시켰다. 그 뒤 임시정부 재무위원장과 내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상해 정안사(靜安寺) 외인묘지(지금의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