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식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시대일보사, 중외일보사를 설립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고, 조선어사전편찬회에 재정을 지원한 독립운동가.
이칭
남저(南樗)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1년(고종 28)
사망 연도
1966년
출생지
경상남도 의령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시대일보사, 중외일보사를 설립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고, 조선어사전편찬회에 재정을 지원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호는 남저(南樗). 경상남도 의령 출신. 일본에 건너가 동경(東京) 쇼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구여순(具汝淳)·최정학(崔正學) 등 동지들과 모의하고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한 다음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0년 귀국하여 안희제(安熙濟)·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를 설립, 경영하면서 비밀리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다. 1926년 서울에서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1927년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를 설립, 사장으로 일하면서 민족의식고취에 노력하였다.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에 가입하여 재정을 지원하였다.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의 편집비를 지원하였으며, 1935년부터는 이인(李仁)·김양수(金良洙)·장현식(張鉉植) 등과 조선어사전편찬의 촉진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거액의 재정지원을 하였다.

1942년 1월 이극로(李克魯)·이윤재(李允宰) 등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조선양사원(朝鮮養士院)을 조직하려다 실패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고, 1945년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선고를 받아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 2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어학회의 재정이사로 선임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3년에 한글공로상을 받았고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사』1∼5(국사편찬위원회, 1965∼1969)
집필자
신용하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