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형우(南亨祐, 1875~?)는 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수석(瘦石)이다.
190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 후 한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서 법학협회가 조직될 때 발기인으로 참석하였다. 1909년에는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였으며, 1911년부터 1917년까지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15년에는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결사를 조직하였고, 조선산직장려계를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된 대한국민의회에서 산업총장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와 조선국권회복단에서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 5,000원을 갖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법무차장에 선임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5월에는 법무총장에 선출되었고 1920년에는 교통총장이 되었다. 1921년 난맥상에 빠진 대한민국임시정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준비되고 있던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회(籌備委員會)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22년 4월 의열 투쟁 단체인 다물단을 조직하였으며, 국민대표회의 추진이 난항을 겪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였다. 1923년 1월부터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주비위원장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다물단원인 서동일을 국내에 잠입시켜 경상북도 청도 · 경산 등지에서 군자금 1,400여 원을 모집하여 송금토록 하였다.
1928년 만주 하얼빈〔哈爾濱〕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다. 1930년에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8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