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청년당은 1909년 10월 경상남도 동래에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계통의 안희제(安熙濟), 서상일(徐相日), 남형우(南亨祐) 등에 의해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조직이었다. 단장은 남형우, 부단장은 안희제였고, 안희제는 제2대 단장이 되었다. 이 단체는 이후 만주지역으로 조직이 확대되었는데 1920년대 중반 경까지 활동상이 확인된다. 일제의 집요한 검거선풍에도 노출되지 않았던 조직이어서 구체적인 조직 시점이나 해체 시점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대동청년단의 구성원인 청년 80여 명은 대부분 경상도 일대의 청년들로 근대적 교육을 받았고 계몽운동단체에 참가했으며 신민회 가담 인사들도 상당수 참여했다. 이 단체는 ‘한일병합’ 이전까지 인재양성을 위한 사립학교 설립 및 후원에 주력했다가 ‘한일병합’ 이후 항일 독립운동단체의 성격이 뚜렷해졌다. 특히 망명했던 안희제, 서상일의 귀국(1913년)을 계기로 활동이 활발해졌다.
1914년 안희제는 동래를 거점으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 서상일은 1913년 달성친목회(達成親睦會)를 재건한 뒤 태궁상회(太弓商會)를 열고 1915년 음력 1월 15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여 대동청년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직활동을 했다.
이 단체는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부응하여 자금을 공급하여 무력투쟁을 지원했고, 백산상회를 거점으로 국내·외 연락활동을 했다. 3·1운동 이전에는 대구·서울·원산·안동·봉천의 지점 및 연락사무소를 기점으로 재만독립운동(在滿獨立運動) 단체를 지원했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은 회사의 상업거래 형식으로 송달되어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 인재양성에도 주력하여 3·1운동을 계기로 그해 11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청소년들의 해외유학을 추진했다. 또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 역할을 수행했고, 의열단의 국내연락기관으로도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