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러시아가 두만강 하류에서 접경하게 된 것은 1860년 9월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러시아가 우수리강 동안(東岸)을 영유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한국의 유리민이 만주의 간도와 연해주(沿海州)로 들어갔고, 이 지역 한인의 수는 1898년 2만 3000명, 1921년 말 9만 4,554명이 되었다.
이와 같이 형성되어간 한인사회에 1905년한족회(韓族會)가 구성되었다. 그 해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하자 동부 시베리아에 출정하였던 러시아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시베리아가 일대 혼란에 빠짐에 따라 한인사회가 자위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 단체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이어 1907년소성(蘇城)에서 대한교육청년회·공진회(共進會)·대한교육청년연합회가, 1909년 공공회(公共會)가 조직되었다. 또한, 1910년 6월 연해주에 망명한 의병을 중심으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이 조직되었다.
유인석(柳麟錫)이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되었는데, 13도의군 도총재 명의로 고종이 연해주로 망명해 망명정부를 수립할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8월 일제의 한국강점 소식이 전해졌다. 이상설(李相卨)은 즉각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鳴會)를 조직, 한국국민위원회 명의로 8,624명의 연명을 붙여 각 국 정부에 일제의 국제적 배신행위를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것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송하였다.
또한 이범윤(李範允)은 의병에 의한 국내진공작전과 나아가 독립전쟁을 계획하였다. 이에 놀란 일제는 러시아에 항의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해 9월 러시아 당국에 의해 13도의군과 성명회 간부가 붙잡히고, 이상설·이범윤 등은 이르쿠츠크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석방되었다.
그 뒤 이상설은 1911년 5월이동휘(李東輝)의 협력을 얻어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본부를 두고, 표면상으로는 한인들의 산업 권장과 교육 보급을 내세우며 실력을 길렀다.
비슷한 시기에 재미교포단체인 국민회(1909)가 조직되고, 미국에서 돌아온 정재관(鄭在寬) 등의 노력으로 시베리아에 16개, 만주에 8개의 지방회(1911)가 조직되었다. 1914년 당시 시베리아에는 2만 9,365명의 의병이 1만 3,000자루의 총을 가지고 각지에서 훈련 중이었으며,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때 러일개전설이 나도는 가운데 이상설을 정통령(正統領)으로 하는 대한광복군정부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러일이 연합하면서 러일개전의 가능성이 무산되고, 러시아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일체의 단체활동을 금지함에 따라 러시아령에서의 독립운동은 침체되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고 '11월 혁명'이 일어나 볼셰비키혁명정부가 들어서자, 러시아는 전국이 적백(赤白)의 싸움으로 혼란하게 되었다.
이에 자극된 한인들은 오영준(오와실리), 유스테판, 김립, 박이반, 채성오, 이한영, 전태국 등 10여 명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원호인과 여호인 사회주의운동 활동가들이 총망라된 전로한족대표자회를 조직하고 1918년 1월 대표자회의를 소집해 한족중앙총회 조직을 결의하였다. 전로한족대표자회는 1918년 6월 니콜리스크에서 열린 제2차 회의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를 발기하였다. 간부진은 회의 마지막 날인 13일 선임하였다.
이때 회원은 2,000명이었고, 간부진에 대해서는 3개설이 있다. ① 회장 한군명(韓君明), 군사부장 오영선(吳永善), 재무부장 김영학(金永學), 외교부장 한명서(韓明瑞)라는 설, ② 회장 문창범(文昌範), 간부 김립(金立)·윤해(尹海)라는 설, ③ 이동휘가 조직하였다는 설 등이다.
대회의 결의사항은, 첫째 한인에 대한 러시아정부의 동화정책 반대, 둘째 앞으로 소집될 러시아입법회의에 한인 의석 하나를 요구, 셋째, 현존 한인학교의 개선 등이었다. 러시아 임시정부에 지지 전보를 보냈으며, 기관지로 『한인신보(韓人新報)』를 발행하였다.
한편, 1918년 1월 이동휘가 하바로프스크에서 박진순(朴鎭淳)을 통해 공산주의 선전요원 그레고리노프와 접촉하고 5월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다. 이동휘는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어떠한 외세도 독립운동에 이용하려 하던 차에 온갖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는 선전에 혹했던 것이다.
한인사회당은 전로한족회중앙총회와 협력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시베리아에 출동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러시아령 지역 독립운동은 타격을 받아 다시 침체기에 빠졌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는 등 새로운 국제정세가 전개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1919년 3월 17일(2월 25일이라는 설도 있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로 개편되었다.
대한국민의회는 의장에 문창범, 부의장에 김철훈(金喆勳), 서기에 오창환(吳昌煥)을 선출하였으며, 독립을 선포하고 일제가 불응하면 혈전을 포고하겠다는 내용의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① 대한국민의회는 조국독립의 달성을 기약하며 세계민족자결주의에 기인하여 한국민족의 정당한 자주독립을 주장함.
② 한일합방조약은 일본의 강압적 수단으로 성립한 것이고 우리 민족의 의사가 아니므로 그 존속을 부인하며 일본의 통치 철폐를 주장함.
③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평화회의에 대표를 보내어 우리의 독립운동과 정부 건설의 승인을 요구하며 국제연맹에의 참가를 주장함.
④ 한국 독립운동의 실정을 세계에 선전하며 정부 건설의 사실을 각 국 정부에 통지하여 우리의 주권을 주장함.
⑤ 이상의 목적이 인도와 정의의 공정한 판결을 받지 못하면 일본에 대하여 혈전 포고를 주장함 등이다.
그리고 별도의 행정부를 조직하여 대통령에 손병희(孫秉熙), 부통령에 박영효(朴泳孝), 국무총리에 이승만(李承晩), 탁지총장(度支總長)에 윤현진(尹顯振), 군무총장(軍務總長)에 이동휘, 내무총장에 안창호(安昌浩), 산업총장에 남형우(南亨祐), 참모총장에 유동열(柳東說), 강화대사(講和大使)에 김규식(金奎植)을 각각 추대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70, 8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계 각층의 인물을 망라하였다. 집행 부서로는 독립군의 조직과 훈련을 담당한 선전부, 독립군자금 모금을 담당한 재무부, 무기 조달을 담당한 외교부를 두었다.
각 국 영사관에 이와 같은 대한국민의회의 성립을 통보하자 미국·프랑스 영사는 동의를 표하였다. 소성 등 각지의 한인들은 독립을 선포하고 경축식을 올렸다. 대한국민의회는 독립군과 군자금을 모집, 모금하고 총기도 구입하여 독립군을 훈련시켰으며, 국내진입전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먼저 발표한 각료들의 행정부가 발족되지는 않았지만 정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해 4월 11일 발족된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사이에 통합문제로 왕래가 있게 되었다.
4월 15일 대한국민의회 대표 원세훈(元世勳)이 상해 임시정부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과 대한국민의회를 병합하고 정부의 위치를 러시아령으로 옮기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임시의정원은 5월 13일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의회를 통일할 것을 결의하고, 7월 11일 ① 임시정부의 위치는 상해에 두되 변경할 수 있다. ② 임시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를 합병하여 의회를 조직하되 러시아령 측에서 강력히 주장할 때는 러시아령에 둘 수 있다고 유연한 결의를 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상해 측에서 특사로 파견한 내무차장 현순(玄楯), 그리고 김성겸(金睲謙)과 교섭하였다. 이동휘가 그 결과를 대한국민의회 의원들에게 의원의 5분의 4가 상해의 임시의정원에 들어가기로 되었다고 설명함에 따라 8월 30일 대한국민의회는 해산을 결의하였다.
이렇게 된 경과를 살펴보면, 4월 23일에 발표되어 한성정부(漢城政府)와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통합하기로 하고 통합은 상해·러시아령·한성의 3개 임시정부 각료명단 중 가장 포괄적인 한성정부 각료명단대로 행정부를 개편하는 방법을 취하였는데, 이 각료명단에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되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곧 이어 이동휘·문창범 등이 상해로 갔다. 상해에 가보니 현지에서의 통합 작업이 교섭 내용과 다르게 진행되고 있어, 대한국민의회측은 반발하여 문창범은 통합정부의 교통총장에 선임되었으나 취임을 거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동휘는 11월 3일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대한국민의회와 상해임시정부의 완전통합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상해임시정부측에서 보면 대한국민의회의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그 권위와 대표성은 크게 강화되었다. 그 뒤 대한국민의회는 활동을 재개하였고 1920년 2월 15일 정식으로 복설(復設)을 선언하였다.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 정부급 경쟁에서 이미 탈락한 대한국민의회이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지니면서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한인의 정치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와 부근 도시 일대를 공격하여 적군(赤軍)을 격퇴하였다. 이 때 한인 독립운동가가 체포되고 가택을 수색 당하게 되어 한인들과 함께 대한국민의회도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5월 극동공화국 흑룡강주(黑龍江州)블라고베시첸스크(黑河市)로 이전하였다. 그곳에서 볼셰비키인 극동공화국 수반 슈티코프의 공작으로 적군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볼셰비키 조직인 기존의 흑룡강주 한인총회가 전술적으로 대한국민의회를 받들고 자진 해산함으로써 흑룡강주에서는 유일 최고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최고려(崔高麗) 등 흑룡강주 한인총회 간부가 요직으로 들어와 기능적으로 변질됨에 따라 대한국민의회의 민족독립운동 진영에서의 총수적 성격과 인맥은 단절되어버렸다.
그 뒤 대한국민의회는 해체되고 모스크바 공산주의가 지도하는 한인동맹이 전러시아의 한인사회를 통괄하게 되었다고 코라르즈는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는 아마도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한국민의회가 어느 단계에서 기능적으로 격하된 것을 해체라고 말한 것 같다.
대한국민의회는 한말 이후 러시아령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고 그 역량을 총집결하여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한 러시아령 지역의 한인 임시정부로서 독립운동사상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