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姜宇奎, 1855~1920)는 평안남도 덕천군 출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찬구(燦九), 호는 왈우(曰愚)이다.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한약방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1885년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영덕리로 이사하여 한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하였다.
1908년 신민회 간부로서 함경도를 돌며 기독교 선교와 학교 설립 운동을 벌이던 이동휘를 만나 감화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후 영명학교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가족들을 러시아로 이주시켰다. 1911년 봄 중국으로 망명하여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두도구에 터를 잡고 만주와 러시아 옌하이저우〔沿海州〕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순회하였다. 1915년경에는 지린성 라오허현〔饒河縣〕으로 거처를 옮겨 100여 호의 마을을 조성하고 신흥동이라 명명하였다. 1917년 봄 신흥동에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9년 3월경 국내의 3 · 1운동 소식을 접하고 신흥동 동포 400500여 명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다. 45월경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고 라오허현 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1919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갔다가 조선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곧 경질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신임 총독을 처단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러시아인에게 영국제 수류탄를 구입하였다. 1919년 6월 14일 수류탄 한 개를 품고 에치고마루라〔越後丸〕라는 일본 배를 타고 원산에 들어왔다. 서울로는 8월 5일에 상경하였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8월 12일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한다는 발표가 났다. 그가 부임하는 날짜는 9월 2일이었다. 그 소식에 신문에 난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 들여다보며 얼굴을 익혔다. 8월 26일에는 남대문역 부근 여인숙으로 거처를 옮기고 매일 역 주변을 답사하며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1919년 9월 2일 명주 수건에 폭탄을 싸서 허리에 묶고 남대문역으로 향하였다. 오후 5시, 사이토 총독 일행이 탄 기차가 남대문역에 도착하였다. 환영 행사를 마친 사이토가 미리 준비된 마차를 타려는 순간, 사이토 총독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마차에서 약 12~13m 떨어진 곳에서 터졌다. 사이토는 혁대에 파편 몇 조각이 박혔을 뿐이었고 수류탄의 위력에 신문기자, 경찰 등 37명이 다쳤다. 그중 2명은 며칠 뒤 사망하였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았으나 보름 후인 9월 17일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소속 경부(警部)인 김태석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1920년 2월 경성지방법원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였으나 4월에 경성고등법원이 기각하였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5월에 경성고등법원이 기각하면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해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