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선장(善長), 호는 미사(薇史).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화원화가로 관직은 부사과(副司果, 종6품), 우후(虞候)를 지냈다. 도화서의 화원으로 1856년부터 1875년까지 순조인릉천봉도청의궤(純祖仁陵遷奉都廳儀軌)를 비롯해서 철종상존호도감의궤(哲宗上尊號都監儀軌), 익종대왕추상대왕대비전가상존호도감의궤(翼宗大王追上大王大妃殿加上尊號都監儀軌) 등에 참여했고, 1861년에는 철종어진도사에 참여했다.
김용원은 1876년 김기수(金綺秀)가 이끄는 수신사(修信使)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그는 이전까지 도화서의 화원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의궤 제작에 참여했지만 수신사행에 선발된 이후에는 주로 기술직 전문가로서의 공적 임무를 수행했다. 이 때 그는 종6품 부사과(副司果)의 품계를 갖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일본인들의 서화 요구에 응해 그림을 그려주는 화원으로서의 역할 보다는 기계와 총포, 아연 등을 구입했던 일종의 기술직 전문가로서 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 근대화된 과학문명을 접한 후 1879년경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의 권유로 사진술을 배우게 되었다.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서 일본인 사진사로부터 사진술을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한 그는 일본을 오가며 기기를 구입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사진술을 도입하게 된 한 사람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그를 “개화(開化)의 효시라 말해지는 사람”이라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1881년에 박정양, 조준영, 어윤중, 홍영식 등으로 구성된 조사시찰단(일명 신사유람단)이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도 참여했다. 본래 참모관으로 파견될 예정이었던 승려 이동인(李東仁)이 갑자기 실종되어 그를 대신해서 김용원이 가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경상좌도의 수군우후(水軍虞侯)라는 관직에 있었는데, 일본에서 기선운항의 제반 사항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임무를 지시 받고 그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이 때도 그는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있으며 1882년에도 김옥균을 따라 도일하여 역시 사진술 및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김용원은 1883년 여름 서울 저동(苧洞)에 촬영국(사진관)을 설치했다. 이 사진관은 김용원이 일본인 사진사 혼다 슈노스케(本多修之助)를 고용하여 운영했지만, 우리나라 사진관의 효시라고 하겠다. 같은 해에 우리나라 1세대 사진가인 서화가 황철(黃銕)도 사진관을 개설했다. 역시 서화가 지운영(池運永)이 1884년 2월에 사진관을 개설했고, 1903년에 김규진(金圭鎭)이 천연당사진관(天然堂寫眞館)을 개설하여 1세대 사진가가 되었다.
또한 김용원은 개화파 및 고종의 신임을 받아 1884년 12월 조러밀약 때는 고종의 밀사로 권동수(權東壽)와 함께 러시아에 파견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