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거나 관련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호칭으로는 사진사(寫眞師), 사진가(寫眞家), 사진작가(寫眞作家), 사진인(寫眞人) 등을 사용한다. 서양의 주1이 한국 사회에 정착해 가면서 주2를 통해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의 경험과 함께 용어의 토착화도 뒤따르게 되었다. 가장 먼저 등장한 용어는 ‘사진사(寫眞師)’였다. 주3 한국 사진도입의 선구자인 지운영이 1882년 시문집 『향추관집』 제2편에서 일본에서 사진을 가르쳐준 헤이무라 도쿠베이[平村德兵衛]의 이름에 붙여 존경의 뜻을 담아 부른 데에서 유래하였다.
“사진사(寫眞師) 헤이무라 도쿠베이[平村德兵衛]에게 드림
무성하게 늘어선 주4을 어찌하여 촬영하나
그림을 포착하고 빛을 전하는 교법(巧法)도 많아라
기이하다 그대 집의 명월경(明月鏡)이여!
사람에게 비추자 뭇 주5를 만드네”
1901년부터 대한제국 황실사진가를 지낸 해강 김규진도 ' 천연당사진관'을 개업하면서 자신의 이름에 자연스럽게 '사진사'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여인들만을 촬영하기 위해 등장한 여성사진가 향원당의 이름에도 '부인사진사'란 명칭을 사용했다. 이때부터 ‘사진사’란 이름은 직업사진가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았고, 근대 문명의 대표적인 과학기술로 사진을 수용한 주6의 개척자로서 인식되었다.
구한말 주7에는 다양한 서구 문명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서양 문물이 한국인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면서 새로운 직업과 새로운 신분이 만들어지는 계층변동의 과정이 있었다. 주8의 의원과는 달리 서양 의술의 시술자에 대해서는 '의사'라는 명칭을 붙였으며, 영어 같은 외국어 교육과 과학기술의 신교육이 실시되면서 서당교육 시절 훈장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교사'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마찬가지로 서양 과학기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사진을 만드는 사람들도 도화서의 화원과는 달리 '사진사'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신문물의 도입자들에게 붙여진 새로운 명칭은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당시대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초기의 '사진사'들은 주9를 추진하던 시대의 관리를 지냈거나 주10로 활동하는 등 사진 외적인 분야에서도 탄탄한 신분의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다. 김용원은 도화서 화원 출신이지만 수군절도사의 아래 종삼품의 고위직 벼슬을 지냈고, 개항 이후에는 외교 사절로 수차례에 걸쳐 일본을 시찰한 적도 있고 고종의 밀명으로 러시아를 다녀온 적도 있었다. 지운영은 개화를 추진하기 위해 설치했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를 지냈으며, 황철은 부친이 종이품인 가선대부였고 금광과 염전 등 막강한 재력을 지닌 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과는 연대적인 차이가 있지만 김규진 역시 영친왕의 사부였으며 후에는 시종장을 역임한 적도 있었다.
처음 활동한 '사진사'들 중에는 해외에 나가 사진을 배워 귀국한 후 사진관을 개업한 경우가 많았다. 일본은 한국과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관계로 초기부터 사진 유학생들은 일본을 많이 찾아 사진을 배웠고, 자연스럽게 한국의 사진관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용원과 지운영은 최초의 일본 사진 유학생이었으며 김규진, 서순삼, 신낙균 등이 뒤를 따랐다. 중국은 우리와 오랜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문화적 중심지와 동떨어져 있어, 사진술 도입의 국가로는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황철 만이 상해(上海)와 천진(天津)에서 사진술의 세계에 개안했으며 서구 사진술의 실상도 이곳에서 체험할 수 있었다.
1910년대를 가로지르면서 사진관을 중심으로 한 북촌의 사진문화가 자리 잡았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1920년대 초반을 전후해 많은 한국인 사진사들은 여러 사진관에서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으며, 일본에 건너가 사진술을 습득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렇게 해서 많은 한국인 사진사들이 탄생하고, 사진관들이 개관하면서 북촌의 사진문화를 이어갔다. 192030년대 사이 서쪽으로는 지금의 종로 1가인 서린동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종로 3가에 이르기까지 청계천 북쪽에는 4050여명의 한국인 사진사들이 사진관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시대에 '사진사'는 주11 사진을 촬영하고 만드는 전문가로 통했으며, 이로 인해 사회적으도 존경의 대상이었다. 문명의 이기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고 대중을 향한 새로운 직종이라는 점에서 의사나 변호사 등과 동격으로 인정받았다. 사진사들은 명사의 예우를 받는 만큼 외모에도 이에 걸맞은 차림을 해 서양식 예복인 주12를 입고 고객을 상대했으며 출사를 나갈 때는 자동차나 인력거를 이용하였다. 먼 거리인 경우에는 고객이 교통편을 마련해 초빙하기도 하였다.
1926년 ' 경성사진사협회'로 조직을 결성하고 지금의 서울 종로 즉 북촌에서 활동한 '사진사'들이 역량을 결집했을 당시 대표적인 '사진사'와 사진관의 흔적은 다양한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린동에는 '경성사진사협회'의 발기인이면서 회장을 지낸 김광배의 ' 금광당사진관'과 ‘애영(愛影)사진관’ 등이 있었고, 낙원동에는 신칠현의 ‘녹성사진관’, 민충식의 ' 태평양사진관', 박만달의 ‘조선사진관'과 1920년대 후반 이름을 바꾼 ' 독립사진관’ 그리고 ‘동양사진관’ 등이 자리 잡았다. 관철동에는 박필호의 ‘모던사진관'과 이름을 바꾼 ' 연우사진관’ 그리고 이완근의 ‘조선사진관’ 등이 있었다. '경성사진사협회'의 결성과 활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한국인 사진사들이었다.
북촌의 '사진사'들 20여명이 모여 한국인의 사진을 걱정하고 어떻게 하면 일본인 사진사들 보다 훌륭한 사진술을 습득해 동포들을 위해 봉사할 것인가를 걱정하면서 '경성사진사협회'를 결성했던 것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였으며, 이러한 좌절의 아픔 속에서 국력을 기르는 것만이 독립할 수 있다는 정신에서 계몽운동이 전개되던 때였다. 사진사들의 결사체인 '경성사진사협회'는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 나타난 민족정신의 발화이자, 1910~2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진 사진사들의 문화적 역량이 결집한 결과였다.
사진사들이 주도한 일제시대의 사진 문화는 몇 가지 중요한 문화사적 성과를 거뒀다. 학문을 권장하는 차원에서 무료로 학교의 졸업 단체 사진을 찍어 기증하는 나름의 사회적 기부를 실천한 근대인을 배출하였다. 또 김규진에서 김시련으로, 김시련에서 다시 김광배로 이어지는 도제형식의 교육을 통해 사진의 주13가 이루어졌고, 이런 인맥이 일본인들과는 대척점에 서서 한국의 사진 문화를 꽃피우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또 여성사진사가 독립적으로 사진관을 개설해서 남성사진사들과 본격적인 경쟁을 펼치기도 하였다. 명동과 을지로, 즉 남촌을 중심으로 활동한 일본인 사진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문화적 양상이었다. 한국의 여성이 근대적 직업인으로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의 대표적인 상징을 만든 것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 사진 문화는 사진사들이 이끌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