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사진관을 설립한 민충식은 1909년 서울의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 경제과에 진학하였다. 1910년 방학 기간 서울에 머물다가 YMCA에 사진과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즉시 단기과정을 수료하고 사진의 길에 들어섰다. YMCA 사진과를 졸업한 직후 사진관을 차려 경험을 쌓았다. 일본인 사진사가 청계천 수표교 길가에 휘장을 쳐서 만든 사진관을 하다가 장사가 잘 안되자 내놓았는데 그것을 80원에 인수해 한택리와 함께 잠시 운영했다. 수표교 사진관은 광목으로 휘장을 친 가설극장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광목으로 하늘을 가렸다 열었다 하면서 채광을 했고, 흐린 날은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사실상의 노천 영업이었다. 하지만 민충식이 일본 유학 과정이어서 짧은 기간만 영업을 하고 문을 닫았다.
일본 유학을 마친 후 상하이에서 코닥(KODAK)사의 판매원으로 활동하던 민충식은 귀국 후 서울 종로의 낙원동에 사진관을 개업했다. 사진관의 개업은 영업을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계몽사업을 위해서였다. 상하이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민족이 아직 실력이 없어 당장의 독립은 어렵다고 보았고. 한 동안 준비를 통해 독립할 능력을 쌓아야 한다는 ‘준비론’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사진관의 설립은 독립 준비 과정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민충식은 1930년 서울 종로 낙원동 218번지에 태평양사진관을 개업했다. 사진관을 개업했을 때는 이미 김광배의 금옥당사진관이나 박필호의 연우사진관을 비롯한 다수의 한국인 사진관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태평양사진관은 이 사진관들에 비해 뒤늦게 개업했으나 규모가 크고 현대적 시설을 갖추고 있어 빠르게 고객을 확보해나갔다. 다른 영업사진사들과 마찬가지로 민충식은 일본인 사진사들에 맞서 권익을 보호하고 보다 발전된 사진술 연구를 목적으로 창립된 한국인 영업사진사들의 단체인 경성사진사협회에도 적극 관여했다. 1930년 태평양사진관에서 처음 개최한 경성사진사협회 주최의 사진술강습회에 관주인 민충식이 강사로 ‘왜 사진을 박느냐’라는 주제의 강연도 했다.
태평양사진관은 개업 초기부터 명성이 높았다. 사진관의 시설도 최상이었고, 장비도 훌륭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코닥 제품을 팔러 다닌 민충식의 기술도 수준급이었다. 기계는 비싸더라도 모두 이스트만 코닥제품만을 사용했다. 서울 장안에서 사진 값이 비싸기로도 유명했고 가장 큰 사진관으로 화제가 되었다. 그런 유명세에 걸맞은 작품도 남겼다. 서울 전경을 찍은 사진이었다. 민충식은 사진을 찍기 위해 360도 회전하면서 촬영되는 코닥 서키트 카메라까지 구입했다. 당시로서는 무척 희귀한 기계이었다. 이 사진은 일본 헤이번샤[平凡社]가 펴낸 36권짜리 『세계지리풍속대계』에 실렸다. 두 폭이 접혀서 들어간 사진에는 ‘조선 경성, 태평양 사진관, 민충식’이라는 표제가 붙었고, 관주인 민충식은 사진에 같이 들어갈 설명문도 썼다.
태평양사진관을 5년 운영한 후에 폐업을 한 민충식은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촬영장을 설립해 「찔레꽃」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 민충식은 YMCA 관련 활동을 주로 했다.
최초의 사진교육기관이었던 YMCA 사진과의 제1회 졸업생 민충식이 사진사로 활동한 태평양사진관의 초상사진은 1930년대 예술사진의 영향 하에 자유로운 표현형식을 도입하여 사진관의 초상사진이 지녔던 정형성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높은 사진의 질을 유지하면서 당시 영업하던 한국인 사진관들의 전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