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옥당사진관은 입치사(入齒師)였던 김경집(金敬執)이 1920년 5월 21일 서울시 종로 공평동 80번지에 개설한 사진관으로, 1921년 5월 조선부인사진관이 개설되기 전까지 서울에서 유일한 조선인 사진관이었다. 이 사진관은 종로 이문(里門) 안에 있었는데, ‘이문’은 “조선시대에 마을의 방법과 방재를 위해 서울의 주요 골목 입구마다 설치한 문”으로 일종의 방범초소였다.
금옥당사진관을 개설한 김경집의 이력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지만, 문헌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1908년경부터 입치사로 활동했다. 입치업자 또는 입치영업자라 부르기도 하는 입치사는 학문적인 연구 없이 간단한 기공만을 도제식으로 배워 기술을 전수받아, 발치(拔齒)와 입치(入齒) 등 단순한 치과 업무에 종사했다. 주로 ‘이 해 박는 집’, ‘잇방’, ‘치술원(齒術院)’, ‘입치세공소(入齒細工所)’ 등의 간판을 내걸고 영업했는데, 김경집의 ‘이해 박는 집’ 상호가 바로 금옥당(金玉堂)이었다.
김경집은 입치사로서 1913년 5월 『신문계』에 「치아의 위생」이라는 글을 기고한 바 있는데, 이때 직함을 ‘금옥당 주인’이라고 썼다. 또한 1915년 6월 『매일신보』에는 “이 해 박는 집은 금옥당 김경집”이라는 문구를 넣어 치술원 광고를 실은 바 있다. 광고에 표기된 금옥당의 주소를 보면 “남대문통1정목(종로)”로 나와 있다. 현 지번 주소로는 ‘중구 남대문로1가 3번지’인데, 종각 바로 아래에 위치했기 때문에 ‘종로’를 병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해 박는 집’으로서의 금옥당 관련 광고는 1919년 7월까지 확인되며, 이후로는 사진관으로서의 금옥당 기사와 광고가 실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금옥당사진관 관련 기사는 1920년 5월 20일자 『조선일보』 지면에 실렸는데, “새 사진관 금옥당은 본월 21일에 시내 공평동 80번지에 개업하고 정미한 기술과 싼 가격으로 오는 손에게 수응한다더라.”라는 내용을 전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김경집은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 입치업에서 사진업으로 전업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금옥당사진관 관련 기사나 광고에는 관주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아 ‘김경집’이 실제 주인인지 확인되지 않지만, 1925년 연우사진관(硏友寫眞舘)을 개설했던 박필호(朴弼浩)는 「사진발달사」[1960]라는 글을 통해 금옥당사진관의 관주가 김경집임을 밝힌 바 있다. “개성사진관에서 기술을 습득한 오경상(吳景祥)이 1915년 개설한 김시련(金時鍊)의 옥영당사진관(玉影堂寫眞館) 기사로 있다가 1917년경 동 사진관이 폐업하자 금옥당이라고 관명을 개칭하여 현 공평동[태서관]에서 치과의사인 김경집 씨와 동업했다.”고 기술했는데, 사진관 개설 연도가 다소 부정확하지만 김경집이 개성의 사진사 오경상과 동업하여 공평동에 금옥당을 개설한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1920년 5월 24일 『조선일보』에 이어 『동아일보』에서도 금옥당사진관의 개관 소식을 전했는데, “경성 시내 현재 조선 사람이 경영하는 유일한 사진관”이라고 소개했다. 10개월 뒤인 1921년 2월 22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금옥당사진관 광고 기사를 보면 “경성에 조선인 사진관은 본관”뿐이라고 전했다. 이 두 매체의 기사를 종합하면 적어도 1920년 5월 21일부터 1921년 2월 22일 사이에 경성에서 조선인이 운영한 사진관은 금옥당사진관이 유일했다.
한편 김경집은 1922년 12월 경성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진업자들이 모여 사진업조합(寫眞業組合)을 조직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초대 조합장을 맡았으며, 사무소를 금옥당사진관 안에 두었다. 그러나 이 조합에 참여한 사진관이 어디였는지, 그리고 이 조합의 구성원이 조선인만으로 구성되었는지 아니면 일본인도 포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금옥당사진관 관련 기록도 1922년 12월 『동아일보』에 낸 광고 기사를 끝으로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아, 이 무렵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