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광사진관 ()

사진
단체
1912년, 김준식이 김현태, 김시련과 함께 서울시 종로 인사동에 개업한 사진관.
이칭
이칭
금광당사진관
단체
설립 시기
1912년
해체 시기
1914년
설립자
김준식, 김현태, 김시련
설립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금광사진관은 1912년 김준식이 김현태, 김시련과 함께 서울시 종로 인사동에 개업한 사진관이다. 금광사진관 이전에는 1907년 김규진이 개설한 천연당사진관이 유일한 조선인 사진관이었으나 금광사진관이 개설됨으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고, 또한 북촌 지역에 개설됨으로서 조선인 중심의 북촌 사진관 시대를 열게 되었다.

정의
1912년, 김준식이 김현태, 김시련과 함께 서울시 종로 인사동에 개업한 사진관.
연원과 변천

금광사진관(金光寫眞館)은 1912년 4월 23일 서부 방교[현 사직동]에 사는 김준식(金濬植)이 서부 야조개[현 신문로와 당주동 경계에 있던 고개]에 사는 김현태(金顯台), 김시련(金時鍊)과 함께 자본금을 모아, 중부 대사동[현 인사동 일대]에 2층 양옥을 신축하여 개설한 사진관이다.

금광사진관을 공동으로 개설한 김준식, 김현태, 김시련 3명의 사진사들이 어디에서 사진술을 배웠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다음의 3가지 경로 중 하나를 통해 사진 교육을 받고 사진술을 습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국내에 개설된 조선인 및 일본인 사진관에서 일정 기간 동안 도제 교육을 받고 사진기사로 활동하거나 사진관을 개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08년 6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본당(本堂)에서 사진미술을 대확장하기 위하여 신식기계를 다수 들여왔고, 한편으로 학생을 무료로 가르치고 있다”는 천연당사진관(天然堂寫眞館) 관련 기사가 실려 있는데, 당시 유일한 조선인 사진관이었던 이곳에서 사진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그 다음으로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에서 설치한 YMCA 사진과에 입학하여 3개월 내지 6개월 과정으로 사진술을 배우는 것이다. YMCA 사진과 외에 1910년 11월 공성학교(共成學校)에서 개설한 ‘사진술강습소’에서도 사진교육이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는 도일(度日)하여 일본의 유명 사진관에서 도제 교육을 받는 경우도 있으나 당시로서는 드문 경우였다.

금광사진관에서도 사진관 개설 기사를 통해 “사진 박는 법을 청년 유지자(有志者)에게 교수”한다는 내용을 전했으며, 1912년 10월에는 ‘사진술강습생 모집’ 광고를 신문에 싣기도 했다. 이렇게 강습생 모집 광고를 낸 이면에는 사진관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남녀 내객뿐만 아니라 연말연초에 답지하는 각종 학교의 졸업식 사진과 사회단체 기념 사진 촬영 등 넘쳐나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속성으로 사진술을 가르쳐 현장에 투입할 사진사를 배출하려 했던 것이다.

1913년 초에는 신년을 맞아 촬영차 사진관을 방문하는 고객들에게 당시로서는 귀한 달력까지 선물 증정할 정도로 번창했다. 1913년 4월에는 매일신보사 주최로 개최된 자전거경주대회에 관주 김준식과 사진기사 김시련이 각각 밀감과 공책을 기부했다는 미담도 전해졌다.

이처럼 사업적으로 성공하고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금광사진관이었지만, 1914년 1월 1일자 『매일신보』에 광고를 낸 이후로 더 이상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마지막 광고의 문구를 보면 “근하신년, 경성 대사동통(大寺洞通) 금광당사진관 주무 김준식”으로 적혀있어, ‘금광사진관’에서 ‘금광당사진관(金光堂寫眞館)’으로 명칭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상호명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무렵 김시련이 천연당사진관의 사진기사로 활동하고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볼 때, 김준식이 김시련과의 동업 관계를 청산하고 상호 변경 후 단독으로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화가 김은호(金殷鎬, 1892~1979)의 회고에 의하면 김시련은 본인과 동갑으로, 1913년 김규진(金圭鎭)을 만나러 천연당사진관에 갔을 때 김시련을 보았다고 고증한 바 있다. 그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김시련은 1913년 금광사진관에서 천연당사진관으로 자리를 옮겨 사진기사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천연당사진관은 오랫동안 사진기사로 활동했던 김규진의 양자 김영선(金永善)이 1912년 평양에 기성사진관(箕城寫眞館)을 개설하며 떠난 이후였기 때문에 실력 있는 사진사가 절실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김규진은 김시련을 스카우트하여 천연당사진관을 전담케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진 수요보다는 서화 수요가 많아지면서 김규진은 천연당사진관보다는 고금서화관 일에 비중을 더 두기 시작했으며, 결국 1915년경 사진관을 접게 되었다. 천연당사진관이 문을 닫자 김시련은 1916년 5월 인사동 30번지에 자신의 이름을 딴 시련사진관(時鍊寫眞館)을 개설했으며, 1919년경에는 청진동에 다시 옥영당(玉影堂)이라는 상호의 사진관을 개업하기에 이른다.

의의 및 평가

금광사진관은 1912년 4월부터 1914년 초반까지 2년 여간 운영되었지만, 천연당사진관과 함께 1910년대 전반기 동안 사진 문화가 정착되고 대중화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남촌 지역인 소공동에 개설되었던 천연당사진관에 비해, 금광사진관은 북촌 지역인 인사동 초입에 개설됨으로써 조선인 중심인 북촌의 사진관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원전

「사진사의 호의, 여러분의 좋은 일」(『매일신보』, 1912. 3. 26.)
「금광사진의 특색」(『매일신보』, 1912. 11. 2.)

논문

이경민, 「김규진과 천연당사진관 (2)」(『사진예술』, 사진예술사, 2016)
이경민, 『한국 근대 사진사 연구: 사진제도의 형성과 전개』(중앙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1)
김은호, 「海岡先生을 追慕함」(『월간 문화재』 4-7, 한국문화재재단, 1974)
주석
주1

1913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로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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