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광당사진관은 김광배(金光培, 1898~1978)가 1925년 종로 서린동 128번지에 개설한 사진관으로, 1920년대 초상사진의 대중화를 이끈 대표적인 조선인 사진관이었다. 김광배는 1919년 청진동에 있었던 김시련(金時鍊)의 옥영당사진관(玉影堂寫眞館)에 들어가 사진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천연당사진관(天然堂寫眞館)의 사진기사로 있었던 김시련은 1916년 시련사진관에 이어 1919년 옥영당사진관을 운영했던 인물로, 당시 경성에서 가장 권위 있는 조선인 사진사였다.
그러나 김광배는 옥영당사진관에서의 도제 교육에 만족하지 않고 좀 더 선진적인 사진기술을 습득하고자, 1923년 도일(渡日)했다. 그는 형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일류 사진관으로 명성이 높았던 노노미야사진관[野野宮寫眞舘]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여기서 수세를 시작으로 수정술과 촬영기법 등의 최신식 사진술을 하나씩 배워 나갔다.
일본에서 2년 가까이 사진술을 습득한 후 1925년 귀국한 김광배는 서린동에 자신의 사진관을 개설하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그해 11월 29일자 『매일신보』에 「가까워 오는 예술사진시대」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 그는 사진 찍기 좋은 계절을 맞아 ‘인물사진을 잘 촬영할 수 있는 팁’을 소개했으며, 이후에도 「사진을 잘 박히려면, 잘 박히려고 애쓰지 말고 자연스런 기분을 가지라」라는 글을 세 차례에 걸쳐 『동아일보』[1930. 2. 13.~2. 15.]에 연재하기도 했다.
인물사진[초상사진]은 사진관의 주력 분야인 만큼 사진사들은 급증하는 고객들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해야만 했으며, 따라서 좋은 인물사진을 위해 새로운 촬영기법이나 장비 등에 대한 정보 습득과 지속적인 실습 및 연구가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김광배의 주도하에 박필호(朴弼浩), 서순삼(徐淳三), 현일영(玄一榮) 등 조선인 사진사들이 모여 1932년 경성인상사진연구회(京城人像寫眞硏究會)를 창립했으며, 사진재료상인 오사와상회[大澤商會]에서 제1회 회원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인물사진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사진계에서 김광배의 명성이 쌓이자 금광당사진관의 규모도 점차 커졌다. 1925년 개설 당시는 한옥을 개조한 사진관이었으나, 1934년 9월 기존 사진관을 헐고 그 자리에 2층 규모의 서양식 건물로 신축 · 확장했다. 그는 최신식 설비의 사진관 주1을 기념하기 위해 1주일간 어린이를 대상으로 무료 촬영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금광당사진관은 사회 및 문화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7년 4월 7일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의 장례가 사회장으로 치러지자, 금광당사진관은 금성당사진관과 함께 장례식부터 장지까지 이르는 행렬을 기록하여 기념하고자 했다. 그리고 2달 뒤인 6월 5일 중앙번영회 주최로 조선에서 처음 열린 ‘경성상인연합대운동회((京城商人聯合大運動會)’의 각종 경기대회와 행사 장면들을 사진에 담았다.
또한 금광당사진관은 경성사진사협회(京城寫眞師協會)의 대외 활동에 있어서 창구 역할을 담당했다. 관주인 김광배가 1926년 조선인 사진사들로 구성된 사진단체인 경성사진사협회의 창립 회원이자 초대 간사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29년 12월 부회장, 1934년 4월 이사장에 선임되었을 정도로 경성사진사협회의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운영하던 금광당사진관을 협회의 활동 공간으로 활용했다. 우선 1930년 7월 경성사진사협회 주최로 열린 제1회 사진술강습회의 신청 장소로 제공되었으며, 1934년에는 오리엔탈사진공업주식회사의 일본인 기사 초청 강연 및 실험회를 이곳 사무실에서 열기도 했다.
1933년부터는 매년 5월 어린이날을 맞아 협회 소속 사진관들과 함께 아동을 대상으로 사진 반액 행사를 펼쳤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사진재료의 수급이 제한되자, 금광당사진관은 다른 사진관들도 마찬가지로 사진 영업 자체가 어려워졌다.
일제 말기에 사진관을 접은 김광배는 해방과 동시에 사진관 운영을 재개했으며, 1946년에는 서울인상사진연구회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는 등 사진계 활동도 이어갔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 다시 사진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앞두고 신문지상에 사진관 광고를 싣고 영업을 재개했으나, 언제까지 운영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30년 가까이 운영된 김광배의 금광당사진관은 1900년대 김규진의 천연당사진관에서 시작해서 1910년대 김시련의 시련사진관(時鍊寫眞館)과 옥영당사진관으로 이어진 조선인 사진관의 계보를 잇고 있으며, 1920년대 사진의 대중화 시대를 연 대표적인 사진관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