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사진사협회 ()

사진
단체
1926년, 서울의 북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한국인 사진사들이 조직한 결사체.
단체
설립 시기
1926년 2월 10일
해체 시기
1940년
설립지
서울
소재지
서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경성사진사협회는 1926년 서울의 북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한국인 사진사들이 조직한 결사체이다. 이 단체의 결성은 직업윤리와 매체의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인 사진단체의 첫 등장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남촌에서 주로 활동한 일본인 사진관들에 대항해 회원 상호 간의 연구 활동을 통해 사진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고, 사진표현 능력을 향상시키며, 사진교육을 실시하고 후학을 양성하여 사진의 저변을 확산하려고 노력했다.

정의
1926년, 서울의 북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한국인 사진사들이 조직한 결사체.
설립 목적과 과정

경성사진사협회(京城寫眞師協會)는 1926년 지금의 서울 종로, 즉 경성(京城)의 북촌(北村)[종로 일대]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한국인 사진사들의 결사체이다. 이 단체의 결성은 직업윤리와 매체의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인 사진단체의 첫 등장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진문화를 이끈 사진관의 활동과 영업은 서울의 북촌은 한국인들만의 무대로, 남촌[을지로와 명동 일대]은 일본인들만의 무대로 양분되어 있었다. 북촌 일대에는 1920년대 중반 이전부터 한국인들에 의한 사진관 영업이 이루어졌고, 사진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서린동에는 경성사진사협회의 발기인이면서 회장을 지낸 김광배의 금광당사진관과 애영사진관, 낙원동에는 신칠현의 녹성사진관, 민충식의 태평양사진관, 박만달의 독립사진관 그리고 동양사진관 등이 자리 잡았다. 관철동에는 박필호연우사진관 등이 있었다. 경성사진사협회의 결성과 활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한국인 사진관들이었다.

당시 민족지로 창간해 한국인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동아일보』『조선일보』는 1926년 2월 10일자로 동시에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경성사진사협회 창립 소식이었다.

“경성사진사협회 : 시내 낙원동에 있는 녹성사진관과 조선사진관의 발기로 금일 오후 8시에 열빈루 에서 경성사진사협회의 발회식을 거행하리라 하는데 시내에 있는 여러 사진사들은 많이 참석하기를 바란다더라.”

북촌의 사진관 주역들 20여 명이 모여 우리의 사진을 걱정하고 어떻게 하면 일본인 사진사들보다 훌륭한 사진술을 습득해 동포들을 위해 봉사할 것인가를 걱정하면서 사진사들의 단체를를 결성했다. 당시는 3·1운동의 좌절의 아픔 속에서 국력을 기르는 것만이 독립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믿음으로 계몽 운동이 전개되던 때였다. 사진사들 역시 이러한 시대 상황에 발맞추어 순수한 한국인들의 단체를 만들었다.

주요 활동

경성사진사협회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보이며 활동하였다.

첫째는 회원 상호 간의 연구 활동을 통해 사진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고 사진표현 능력을 향상시키려 노력했다. 경성사진사협회는 매월 1회 또는 격월간으로 ‘강화회(講話會)’를 개최했는데, 이는 남촌의 일본인 사진관들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한국인 사진관들의 사진 품질을 향상시켜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 내용은 크게 사진의 가치와 영업 전략, 인화법과 기술적 표현 방법의 두 가지로 나뉜다. 이제창의 ‘인생과 예술’이나 민충식의 ‘왜 사진을 박느냐’ 등은 전자였고, 신낙균의 ‘오일과 브롬오일’이나 일본 오리엔탈사진공업주식회사의 전문가를 초빙해 실시한 ‘실내 인상사진 강연과 실습’ 등은 후자였다.

둘째는 사진교육을 실시하고 후학을 양성하여 사진의 저변을 확산하려고 했다. 1927년 이후 유일한 사진 공교육 기관인 YMCA 사진과를 운영한 이들은 바로 경성사진사협회의 신낙균과 그 회원들이었다. 이들은 1930년에 들어와 사실상 폐과가 된 YMCA 사진과를 유지하고자 ‘사진강습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여 사진학 보급과 한국사진의 질적 수준 향상을 도모했고, 사진 교육에 대한 관심과 노력은 정식 교육기관 경성사진학강습원의 설립으로까지 이어졌다.

명목상으로만 유지되고 있었던 YMCA 사진과가 1933년 12월을 마지막으로 공식 폐과하자 1934년에 경성사진사협회, 경성인상사진연구회, 경성사구회의 세 단체 연합으로 공식 사진교육기관 경성사진학강습원으로 인가를 받아 본격적으로 운영하였던 것이다.

셋째는 회원 간의 친목 도모와 결속력의 강화, 한국 사진의 역사 정립, 사회봉사 활동 등을 통해 사진사들의 자긍심과 사회적 위상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경성사진사협회의 총회는 대략 1년에 1번 이상 열렸고 특별한 안건이 있을 때는 2번을 가졌다. 10년 이상 근속한 사진사들에게는 표창을 하였다. 또 한국 사진의 역사를 구성하기 위해 사진과 문헌 등의 사료를 수집하는 캠페인도 벌였다.

그리고 1933년~35년까지 삼남(三南) 지방에 발생한 홍수 피해에 ‘의연금’을 내거나 매해 ‘어린이날’을 맞아 무료 또는 특별 반액 행사를 개최하며 민족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진사들의 사회적 역할을 다하였다.

의의 및 평가

경성사진사협회는 협회의 지도자였던 신낙균이 『동아일보』 ‘ 일장기 말소사건’의 중심 인물로 구속되면서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더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사회, 문화 전 분야에서 조선인의 활동이 탄압받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 들어 일제는 조선의 지식인들과 각 사회단체에 친일활동의 선전 선동에 앞장설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부한 단체의 활동은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라지고 말았지만 경성사진사협회는 북촌 사진문화 발전의 결과였고, 매우 근대적인 성격의 사진사 결사체로 시대적 환경 속에서 등장한 민족정신의 산물이었다.

참고문헌

원전

이동호, 「새로운 사진이 나오기를」(『사진문화』 12, 1950)
『조선일보』(1926. 2. 10.)
『동아일보』(1926. 2. 10.)

단행본

박주석, 『한국사진사』(문학동네, 2021)
최인진, 『한국사진사 1631~1945』(눈빛, 1999)

논문

최인진, 「해제: 선생의 사진학 저술, 사진사상, 생애를 중심으로」( 『1920년대에 쓴 최초의 사진학』, 도서출판 연우, 2005)
집필자
박주석(명지대 교수, 한국사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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