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경(稚敬), 호는 벽서(碧棲) · 회와(晦窩).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15대손이며, 증 규장각제학 이종청(李鐘淸)의 아들이다.
진사와 군수를 지낸 뒤 1882년(고종 19)에 증광별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 1884년 부수찬을 지내고, 이듬해에는 선전관을 역임하였다.
1890년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며, 1894년에는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이 해에 홍주목사로 있으면서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동학교도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공주의 앞뒤 요충지에 진을 쳤다.
1895년 을미개혁으로 지방관제가 개혁될 때 홍주부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홍주에서는 강직한 관리로 이름났던 김복한(金福漢) · 이설(李偰) · 안창식(安昌植) · 안병찬(安炳瓚) · 임한주(林翰周) · 이근주(李根周) 등이 을미사변 직후부터 기병을 계획하다가 단발령을 계기로 창의하여 공주와 임존산성(任存山城)을 점거하는 등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이 때 관찰사로 있던 이승우는 거짓으로 이 의병진에 가담한 뒤 몰래 정부측 관리와 내통하여 순검대를 끌어들여 김복한 · 이설을 비롯한 의병진의 주요인물들을 체포, 투옥함으로써 의병진을 강제 해산하게 하였다.
1896년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으며, 1898년에는 봉상사제조가 되었다.
1900년 궁내부특진관을 지내고 1904년 충청북도관찰사, 1905년에는 전라북도관찰사를 지냈다. 그리고 이 해에 전라북도선무사가 되어 각 군을 돌며 군민을 위무하였다. 1906년 전라북도재판소 판사를 거쳐 다시 궁내부 특진관과 봉상사제조를 역임하고 조경단 수개(修改) 때 감동(監董)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909년 팔괘장(八卦章) 훈장을 수여받고 1910년 정경(正卿)으로 승진되면서 규장각 제학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