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

조선일보 창간 기념호
조선일보 창간 기념호
언론·방송
문헌
1920년에, 조선일보사에서 신문명 진보주의의 선전을 목적으로 창간한 일간 신문.
정의
1920년에, 조선일보사에서 신문명 진보주의의 선전을 목적으로 창간한 일간 신문.
개설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 서울 관철동 249에서 타블로이드 배대판(倍大版) 4면의 6일자 석간을 창간호로 내놓았으며, 제2호는 창간 특집으로 8면을 발행하였다.

사장 조진태(趙鎭泰)를 비롯하여 당시 경제단체인 다이쇼실업친목회(大正實業親睦會)의 중견 인물들이 간부진을 형성하였다. 발행인 겸 부사장 예종석(芮宗錫), 편집국장 최강(崔岡), 이 밖에 서만순(徐晩淳) · 최원식(崔瑗植) · 최남(崔楠) · 방한민(方漢旻) · 최국현(崔國鉉) 등이 참여하였다. 창간 당시의 발행 목적은 ‘신문명진보주의(新文明進步主義)의 선전’이었다.

편찬 · 발간 경위

이 신문은 창간된 지 반 년도 못 되어 30여 차례의 기사 압수처분을 받았다. 그 후, 강우규(姜宇奎) 의사의 사형선고에 관한 대대적인 보도와 강압에 대한 조선인의 항거를 막을 수 없다는 뜻을 담은 ‘자연의 화(化)’라는 논설이 치안 방해를 선동한다 하여 총독부로부터 우리나라 민간지 등장 이후 최초로 1주일간의 정간 처분을 받았다. 이 정간이 풀리던 날 다시 “우열(愚劣)한 총독당국은 하고(何故)로 우리 일보(日報)에 정간을 명하였나뇨.”라는 논설을 9월 5일자 신문에 실어 곧바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2개월 후 정간조치가 풀렸으나 경영난으로 12월 24일까지 발행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속간하면서 1921년에는 ‘골수에 맺힌 조선인의 한’이라는 10회에 걸친 연재기사를 싣는 등 항거를 계속하여 4차까지 정간 처분을 받았고, 그 가운데 한국 신문사상 가장 긴 1년 4개월의 정간 처분을 받은 적도 있었다.

1921년 4월에는 남궁훈(南宮薰)이, 1924년 9월에는 이상재(李商在)가 사장에 취임하였고, 안재홍(安在鴻) · 백관수(白寬洙) · 이상협(李相協) · 김동성(金東成) 등이 이사진에 취임하면서 ‘조선민중의 신문’이라는 기치 아래 혁신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1924년 7월 22일에는 한국 신문 최초의 지방판으로 4면의 경북판(慶北版)을 발행하였다.

1931년 7월에는 안재홍이, 1932년 4월에는 유진태(兪鎭泰)가, 다시 6월에는 조만식(曺晩植)이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조병옥(趙炳玉) · 주요한(朱耀翰) 등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수차례의 정간, 특히 1년이 넘는 정간은 폐간이나 다름없어 재정은 황폐해지고 사원들이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초창기에 경영상의 시련을 겪어 오던 이 신문은 1933년 방응모(方應謨)가 회사를 인수하면서부터 중흥을 도모하였다. 방응모는 ‘정의옹호, 문화건설, 산업발전, 불편부당’이라는 사시(社是)를 제정하고, 편집 진용에 이광수(李光洙) · 주요한 · 서춘(徐椿) 등을 기용하였다.

1933년 7월 조만식 사장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방응모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태평로 1가 61에 현대식 사옥을 신축하고 전광식 고속윤전기 · 자동주조기 · 통신용 비행기 등을 도입함으로써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1933년에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마련한 ‘한글통일맞춤법’을 채용, 과감히 지면에 옮김으로써 민족문화 향상에 기여하였다. 특히, 학예면을 활용하여 인문 발전에 정성을 쏟았으며, 같은 해 신춘문예작품 모집을 시작하여 문예를 통해서 발산되는 민족혼을 앙양하고 젊은 인재들 발굴을 꾀하여 오늘날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1934년에는 출판부를 두고 『조선명인전』 등 서적 간행사업을 펼쳐 일제가 퇴색, 왜곡시키려고 애쓰는 민족역사의 참모습과 민족적 위인들을 널리 알리는 데 진력하였다.

아울러 1935년 월간 종합지 『조광(朝光)』을 창간 · 발행하였고, 1936년에는 여성교양지 『여성(女性)』을 월간으로 펴내 우리 나라 여성의 역할과 지위 향상을 유도했으며, 학생들을 위한 잡지로서 월간 『소년(少年)』을 출판하였다.

또, 향토문화사업위원회를 사내에 두어 우리 고유의 민속과 향토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각종 사업을 주관했으며, 관련 기사를 장기 연재하는 한편, 축구 등 운동경기의 보급과 백두산 · 금강산 탐승단을 조직, 젊은 기상을 함양하고 체력단련을 꾀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조선일보』는 민족지로 부를 수 없는 모습을 보였다. 변모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 첫째, 일제의 통제에 놓여 사실상 언론자유가 없었다.
  • 둘째, 일제강점 이후 20여년이 흘러 지식인 사이 항일의식이 다소 무뎌졌다.
  • 셋째, 항일투쟁 노선이 분열하며, 지식인 역시 분열하였다.
  • 넷째, 상업성에 치우치며 언론의 사명을 잊었다.

그 결과 1930년대에 들어서자 조선일보는 총독부 기관지와 구분이 힘들 정도로 변모하였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이후 1940년 8월 10일 지령 6,913호로 강제 폐간 당하였다.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1945년 11월23일 B4판으로 복간되었고, 1948년 12월부터 배대판으로 발간되었으나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방응모 사장이 납북되고, 인쇄시설도 일부 파괴됨으로써 신문 발행이 중단되었다. 수복 후 서울에서 속간하였으나 곧 철수, 1951년 2월 1일 부산에서 전시판(戰時版)을 발행함으로써 신문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는 등 한동안 신문을 제대로 발행하지 못하였다.

서울이 다시 수복된 뒤인 1952년 겨우 시설 정비를 마치고, 1954년 4월 방일영(方一榮)이 대표취체역에 취임, 배대판 4면의 신문을 발행함으로써 지면을 정상화시킬 수 있었다. 1956년 4월 1일부터 국내 최초로 조 · 석간제를 단행하여 조간 2면, 석간 4면을 발행하였다. 5·16군사정변으로 군정이 들어선 뒤 언론에 대한 제약은 날로 심해졌고, 회사의 간부와 기자들이 연행되거나 구속당하는 일이 여러 차례 일어났으며, 언론자유를 위한 격동기를 겪었다.

1964년 4월에는 이웃돕기운동을, 그 해 6·25전쟁 14돌을 맞이해서는 납치인사 송환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등을 전국민적 운동으로 승화시켰으며, 국민의 정신문화 함양을 위한 각종 기획특집과 연재물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1967년 발행인 방우영(方又榮)이 사장으로 취임하여, 사옥의 신증축 및 최신 윤전기의 대량도입 설치 등 인쇄시설의 확장, 개선과 아울러 각종 문화사업을 벌여 새로운 중흥기를 이루어 나왔다.

1969년 9월에는 현재 사용중인 중구 태평로 1가 61의 현대식 건물로 사옥을 이전하였다. 「반세기의 증언」 · 「횃불은 흐른다」 · 「개화백경」 · 「인물로 보는 한국학-인맥(人脈)」 · 「오늘을 사는 지혜」 · 「한국인의 의식구조」 · 「한국의 연륜」 · 「길따라 사람따라」 · 「그 산하 그 인걸」 등의 장기 연재는 민족의 전통을 이어 발전시키고 정신문화를 제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980년 3월 창간 60주년을 넘기면서 그 해 5월 발간 부수 120만 부를 돌파함으로써 우리나라 최대 일간지 가운데 하나로 그 위치를 굳혔으며, 1980년 4월부터 조간 단간제로 바뀌어 발행되고 있다.

또한, 1983년 7월에는 뉴욕에, 1984년 6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 1987년 3월에는 브라질에, 1990년 8월에는 시카고에, 1993년 1월에는 밴쿠버에 해외판을 창간하였다.

서지사항 및 현황

2009년 현재, 조선일보의 판형은 표준판(대판, B3)을 사용하고 있으며, 주 발행면수는 312면이다. 일본의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 러시아의 『프라우다』, 중국의 『인민일보(人民日報)』 등과 뉴스를 교환하고 있으며, 미국 · 일본 · 중국 · 영국 등 세계 주요 19개 지역에 해외 지사 · 지국을 가지고 있다. TV조선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다.

참고문헌

『조선일보90년사』(조선일보사, 2010)
『2009 한국신문방송연감』(한국언론재단, 2009)
『일제말기 식민지 지배정책 연구』(최유리, 국학자료원, 1997)
『한국신문백년지』(윤임술 편, 한국언론연구원, 1983)
「일제강점기 한글신문의 변모양상 -'친일'과 '민족'-」(박환,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8, 2009)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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