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순삼은 릴리프 기법, 반전 인화 기법 등을 통해 실험적 사진 세계를 구축한 사진가이다. 1922년 일본 도쿄의 고니시로쿠사진전문학교에 입학해 사진을 배웠다. 1925년 평양에 삼정사진관을 개업하였고, 1930년에는 조선일보 후원으로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개인 사진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4후퇴 당시 남하하여 서울에 정착하였으며, 대한사진예술연구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50~1960년대에 릴리프 기법, 반전 인화 기법 등을 통해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사진 세계를 구축하였다.
1903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호는 설천(雪川)이다.
1922년 일본 도쿄[東京]의 고니시로쿠사진전문학교[小西六寫眞專門學校]에 입학하여 사진을 공부하였으며, 1925년 평양에서 삼정사진관을 개업하였다. 평양을 기반으로 사진 활동을 시작한 서순삼은 1928년 평양사진조합을 창설하고 간사를 맡으면서 평양 사진계의 지도자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당시 서울에서 결성된 경성사진사협회 회원들과도 교류를 가지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28년부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평양지국 촉탁으로 저널리즘 사진가로도 일하였는데,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의 기록 사진을 남기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조선일보 평양지국 2층에서 한국 사람으로는 정해창에 이어 두 번째로 개인 전람회를 열었다. 이때 전시된 서순삼의 사진들은 프린트가 남아 있지 않아서 작품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힘들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작품은 크게 인물과 풍경으로 이루어졌으며, 고무 인화법이나 브롬오일 인화와 같은 특수 인화 방법을 이용하여 피그멘트의 질감을 살린 픽토리얼리즘 분위기의 사진들이었다. 조형 감각이 매우 뛰어난 작품들이었다고 전한다. 이는 당시 일본이나 우리나라의 사진 예술 선각자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던 첨단 기법들이 동원된 것으로, 1950~1960년대에 서순삼이 만든 릴리프 기법 혹은 반전 인화 기법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뛰어난 작품 역량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 단서가 된다.
서순삼은 이후에도 전조선사진전람회나 일본의 대표적인 사진 잡지인 『아사히카메라』의 지상 공모전 등에 작품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에는 서울에서 결성된 경성인상사진연구회에 창설 회원으로 참여하여 인상 사진의 연구와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 매년 YWCA 화랑에서 경성인상사진연구회 멤버로 전시회를 가졌다. 1933년에는 일본 관서사진연맹 평양지부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전조선사진연맹 공모전에서 작품 2점이 당선되었다. 또한 현일영, 조각가 문석오 등과 함께 오월회(五月會)를 조직하였다.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서순삼은 1·4후퇴 당시 남하하여 서울에 정착하였다. 이미 전국적 지명도를 가졌던 서순삼은 1950년대 초반 대표적인 사진 예술 단체였던 대한사진예술연구회 고문[1952]을 맡았고, 임석제와 함께 광화공방(光畵工房)을 운영하며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956년부터는 서울 신문학원에서 보도 사진을 강의하면서 주1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생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8년 세브란스의과대학 시청각실에 취직해 약 8년 동안 일하기도 하였다. 의학에 필요한 자료 사진 제작이 주된 일이었기 때문에 사진가로서의 길과는 다소 동떨어진 행보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미경 사진 등 직업 활동에서 만난 새로운 과학 사진 이미지들은 그의 작품을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기초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서순삼의 월남 이후 작품은 릴리프 기법이나 반전 인화 기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실험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직업으로서 의학 사진을 다룬 이후 실험하고 창조해 낸 독자적 사진의 세계이다. 사물을 흑백으로 찍은 다음 이를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두 장으로 만들고, 이 두 장을 약간 엇비껴 겹친 다음 인화를 하는 기법은 사진 예술의 방법론으로 국내에서 서순삼이 처음 시도한 방식이다. 서순삼의 작품 중 릴리프 기법을 쓴 사진들은 나뭇가지나 해바라기, 항아리 등을 소재로 하였는데, 형태의 윤곽 자체가 매우 인상적인 것이거나 반복을 통해 패턴 자체가 매력적으로 비칠 수 있는 대상들이다.
1961년부터는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을 역임하였으며, 1973년 서울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