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선사진전람회는 1934년부터 1943년까지 10년 동안 전국 규모의 연례행사로 개최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예술사진을 제도화한 국내 사진계의 최대 주1이었다. 이는 『경성일보』와 전조선사진연맹에서 주최한 일종의 주2 형식의 공모전으로, 당시 주3 조선에서 가장 큰 공적 권위를 자랑하였다. 『경성일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였고, 전조선사진연맹은 『경성일보』가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사진가를 중심으로 조직하여 전국의 50여 개 사진 단체가 가입한 조선 내 최대 사진가 단체였다. 이들이 『경성일보』[1934.10.5.] 지면을 통해 공모전의 시작을 알린 이래 그 명칭은 처음 조선사진전람회에서 전조선사진전람회(1934), 조선사진살롱[19351939년], 조선사진전람회[19401943년]로 바뀌었다. 행사명은 여러번에 걸쳐 바뀌었으나 운영 방식은 10년 동안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전조선사진전람회의 운영 및 공모전 작품 심사는 일본인이 주도하였다. 특히 조선총독부 식산국(殖産局) 지질조사소 직원으로 전조선사진연맹을 결성한 야마자와 산조[山澤三造]는 10년간 전조선사진전람회의 대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예술 사진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수상작 대부분도 일본인 위주였으며 한국인의 당선작 비중은 전체 당선작 중 10% 미만에 불과하였다. 이 공모전의 첫 회 출품작은 500여 점이었으며, 입상자의 절대 다수는 일본인이었다. 수상작은 수상소감과 더불어 『경성일보』 지면에 발표되었으며 미스코시[三越]백화점 갤러리[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 본관] 뿐만 아니라 지역 순회전을 통해 공개되기도 하였다. 전조선사진전람회의 입상은 조선인 사진가들의 가장 큰 목표가 되기도 하였으며 10년 동안 이태경, 최선동, 정도선, 김정래, 박필호, 서순삼, 이형록, 임응식, 조상규, 최계복, 현일영 등이 입선하였다.
전조선사진전람회의 작품 경향은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제1회전에서 제4회전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사진계 뿐만 아니라 타 예술계에서도 등장한 ‘향토색[Local Color]’이 두드러졌다. 즉 주4이고 낭만적인 농촌이나 교외의 일상, 조선 고유의 생활 양식 등 ‘향토색’, ‘지방색’, ‘조선색’의 이미지가 주를 이루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자연물을 통한 조형성 탐구, 인물 표현과 같은 경향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신흥 사진의 영향으로 클로즈 업[Close-up][^5], 주6, 피그먼트 인화[Pigment Print] 등의 기법도 등장하였다.
후기는 1937년 주7 발발 후 제5회전부터 제10회전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시국색’을 강조하여 전시 체제의 일본군의 위용, 평화로운 후방, 비상 시국에 협조하는 후방의 마음가짐과 자세 등을 드러내었다. 즉 주8, 주9, 천인침(千人針), 항공기 등의 상징적 소재나 장소를 통해 시국을 표현한 프로파간다[propaganda][^10] 사진이 입상작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는 신체제론이 제기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발족한 1940년에 들어와 ‘시국색’이 반영되지 않은 작품은 심사에서 제외한다고 선포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1944년 전조선사진연맹은 전일본사진연맹 조선지부, 경성사진방첩연맹과 더불어 해체되고 사진보국회로 통합되었다. 10년 동안 지속된 전조선사진전람회는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예술 사진의 경연장이자 사진 작가의 주11으로 예술 사진을 제도화하고자 하였다. 특히 조선사진전람회가 제도적으로 정립한 공모전 형식은 이후 조선인 중심의 공모전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한국 사진 예술의 전개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는 조선총독부가 조선 사진계를 통합, 관리하고 조선의 사진 제도를 통제, 장악하려고 했던 주12 ‘문화 정책’의 일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