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는 일제 시대의 예술사진을 추구하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조직한 단체였다. 창립 연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1937년 전후로 추정한다. 당시 전국의 아마추어 사진 단체는 70여개 이상으로 활발한 사진활동을 보였고 회원수도 1천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내의 아마추어 사진 단체는 대다수가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단체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는 한국인만으로 결성된 단체로서 민족 정신을 바탕으로 일본인 사진인들에 대항하고자 한다는 사진 단체 결성의 의지를 다지는 한편, 아마추어 예술사진을 표방하면서 사진단체 활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서울 시내의 아마추어 사진가 23명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의 창립멤버로는 이태웅, 현일영 , 박영진, 김정래, 이규완, 박필호, 이해선, 박래현, 김석현, 이겸수, 이성윤, 임병기, 김한두, 홍달호, 이일구, 정용석, 박명진, 임병달 등이 포함되었고 초대 회장은 박영진이었다. 아마추어 사진가 단체를 표방했으나 영업사진가와 신문사 사진기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발기인들은 명월관에서 야간 촬영회를 겸한 창립총회를 열고 아마추어 예술 사진을 표방하면서 사단 활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태웅과 현일영이 단체의 이론적 방향을 구축하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임병기는 서울역 앞 양동에 있던 무림합명회사라는 본인의 회사 건물에 암실을 만들어 회원들이 이용할 수 이있도록 하는 등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의 중요한 행사로는 연 1회 인화전람회를 개최하여 회원들의 작품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장을 제시하는 한편 매월 월례회와 촬영회 등을 진행하였다. 월례회 때는 매월 촬영한 사진의 제출을 의무화하고 회원들의 작품에 대해 토론을 진행하였다. 월례회에서 뽑힌 우수 작품은 단체의 본부 역할을 한 오자와 상회의 진열창에 상설 전시되었다.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경성아마추어 사진 구락부는 아마추어 사진 단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식민지의 심한 규제 대상이었다. 집회 신고는 의무 조항이었고 촬영이나 전시에 대해서도 감시와 통제를 피할 수 없었다.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는 1943년 해산하였는데 이해선은 단체의 해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는 1943년에 종언을 고했어요. 그때는 전쟁이 한창이었고 사진재료도 관청에서 배급제도로 한 달에 사진 하는 사람들에게 필름 몇 개, 인화지 몇 장, 이렇게 하니 충분한 작품 활동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단체에 대한 해산령이라는 것이 있어서 순수한 예술단체이지만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어서 해산을 하고 말았어요. 당시에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우선 월례회 날짜를 정하게 되면, 시간과 장소를 관할 경찰서에 신고를 해요. 그러면 형사가 그 장소에 나와서 모임을 지켜보고 감시를 해요. 사진을 전시할 때도 누드 사진은 절대로 내지도 못하고, 풍기문란이라고 떼어내니까. 또 촬영을 해도 가령 당인리나 그 근처에 나가 촬영을 했다가 고압선이나 가는 전선주 하나만 찍혀도 전쟁 때이니까 당장에 철회하라고 했어요. 사실 일본 관헌들에게 부대낀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는 일제강점기 예술사진을 추구하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조직한 단체로서 일제 식민지의 심한 규제와 감시 속에서도 한국 예술사진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사진 활동을 한 대표적인 한국 사진단체로서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