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진은 서양의 픽토리얼리즘사진을 번역한 용어로, 1920년대 후반부터 1940년경 사이 다양한 공모전이나 개인전에 출품한 사진 전반을 지칭한 사진의 장르이다. 일제강점기에 예술사진이 중요한 장르로 부각된 것은 1920년대 일본 사진 문화의 영향 때문이다. 당시 한국의 사진가들은 주로 사진관 영업 활동을 하며 초상 사진을 촬영해 왔다. 한편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웠던 선각자들은 사진을 새로운 예술의 형태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픽토리얼리즘의 영향 아래서 특수인화법, 연초점 기법 등을 활용하여 예술사진을 추구하였다.
사진술주1 수용 이후 초창기 한국 사진은 사진관을 운영하며 주2 사진을 촬영해 온 영업사진사 중심으로 흘러왔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에서 사진술을 습득하고 귀국한 선각자들이 합류한다. 신낙균, 정해창 등은 한국인 영업사진사들과 긴밀히 교류하며 각자의 방식대로 예술사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신낙균은 1927년 동경사진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특수인화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예술사진 운동을 펼쳤으며, 1929년 정해창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처음으로 예술사진 개인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서순삼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1929년 평양에서 예술사진 전람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 시기 예술사진은 1920년대에 일본에서 유행하던 픽토리얼리즘의 영향 때문에 회화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주로 주3 기법을 활용하였다. 또한 고무인화, 피그먼트 인화법 등을 활용하여 선명한 이미지보다 뿌옇고 희미한 효과를 얻어내고자 했다.
제도의 측면에서 예술사진은 주로 주4을 통해 퍼져나갔다. 공모전은 영업 활동에서 벗어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예술사진을 발표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었다. 예술사진을 추구하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등장과 더불어 수많은 아마추어 사진가 단체가 설립되었으며, 이들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다수의 공모전이 등장했다. 이 시기의 사진가들은 주로 공모전 입상을 위해 작품 활동을 했으며, 주제는 향토색을 강조하는 주5 풍경 위주였다. 공모전 입상으로 명성을 떨쳤던 대표적인 예술사진가로는 정도선, 최계복이 있다. 경성일보, 매일신보 등 각종 일간 신문들이 지면을 할애하여 공모전과 촬영회 등을 주관했으며, 조선일보와 같은 민족지들도 " 납량사진 현상모집"과 같은 공모전을 주관하여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예술사진 활동을 장려하였다.
예술사진은 일제강점기의 한국 사진을 대표하는 가장 큰 흐름으로 남게 되었지만 풍경 위주라는 주제의 편향성과 함께 공모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제도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한편 해방 이후에 등장한 주6 사진은 일제강점기의 예술사진을 ' 살롱사진'으로 규정하고 차별성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 결과 살롱사진은 예술사진을 대신하는 용어로 귀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