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량사진 현상모집'은 『조선일보』가 예술사진 운동의 일환으로 1937년부터 강제로 폐간이 되었던 해인 1940년까지 총 4회에 걸쳐 매년 진행된 사진 주1이었다. 일제시대에는 「 전조선사진연맹」이나 '조선사진전람회'와 같은 일본인 사진 단체와 사진 행사 위주로 예술 사진이 확산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민간지로서 『조선일보』는 민족 문화 창달을 목표로 하는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예술사진을 공모하는 행사를 만들고 신문의 지면에 당선작들을 게재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사진의 리더 역할을 했던 박영진, 최계복, 김정래, 서순삼, 이형록, 김진수 등이 이 공모전에 참가하여 입상하였다. 1940년 주최자인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되어 현상모집은 4회로 끝났다.
제1회는 특별한 공모 주제가 없었고 제2회 주제는 ‘여름 풍경’ 이었으며 제3회는 ‘구름과 물’, 제4회는 ‘약진 조선의 표정’ 이었다. 그러나 1940년 제 4회에는 '납량사진 현상모집'이라는 명칭 대신에 '사진 현상모집'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8월 4일 공모를 마감했으나 『조선일보』가 8월 10일에 폐간 됨에 따라 행사가 중지되어 입선작을 발표하지는 못했다. '납량사진 현상모집'의 각 주제는 공모전의 명칭에 사용한 주2’이라는 단어에서도 드러나듯이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느낄 수 있는 납량의 미를 표현하는 사진을 추구하였다. 1937년 첫 공모전의 사고(社告)에서 “우리가 가진 명승, 고적을 널리 선양하고 사진 기술의 예술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동시에 만곡량미를 실은 청신한 화면을 지상에 발표하여 만천하 독자 제위의 쇄하에 자코자 함”이라고 행사의 목적을 밝혔다. 사진을 통해 우리의 전통과 문화의 미를 알리고 사진 예술의 가치를 고양하는 한편 더운 여름을 극복할 수 있도록 청량한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겠다는 취지였다. 『조선일보』는 입상작을 발표한 이후 모든 수상작을 한 작품 씩 신문 지면에 게재하였다.
현상 모집의 심사는 『조선일보』의 내부 편집국장, 미술부, 사진부 기자들과 외부 심사위원으로 구성되었다. 박필호를 비롯해 현일영, 안철영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바 있다. 한국 사진을 주도한 예술 사진가들 상당수가 이 공모전을 통해 인지도를 높였다. 민간 신문과 사진가들이 함께 하여 사진의 지위를 예술로 향상시키고 널리 확산시킬 수 있었던 전국적인 규모의 큰 행사로서 참가하는 사진가들의 수도 점차 증가하였다. 사진 공모의 주제가 매년 변화를 보이기는 하지만 출품작과 수상작을 살펴보면 주로 풍경 사진이 상당수를 차지하였다. 당시 풍경 사진은 예술 사진의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는 일제강점기 문화 예술 분야에 영향을 미친 향토색 담론과도 연관성이 있다.
'납량사진 현상모집'은 일본인 위주의 사진 행사에서 소외된 한국인 아마추어 예술 사진가를 위해서,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현상 모집이었다. 한국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예술사진에 대한 열망을 표출하고, 그들의 사진 작업이 인정 받을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납량사진 현상모집'은 예술사진 행사의 제도화와 대중화에 기여하면서 사진을 예술 장르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