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부부사진사건 ()

사진
사건
1926년, 일본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박열 부부의 사진이 유출되어 일본 정계에 혼란을 야기하고, 한국사회와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인 사건.
이칭
이칭
박열 부부 괴사진(怪寫眞) 사건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926년
종결 시기
1927년
발생 장소
일본
관련 국가
한국
관련 단체
불령사(不逞社)
관련 인물
박열, 가네코 후미코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박열 부부 사진 사건은 1926년, 일본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박열 부부의 사진이 유출되어 일본 정계에 혼란을 야기하고, 한국사회와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인 사건이다. 일명 ‘박열 부부 괴사진 사건’으로도 일컬어진다. 사진은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일본인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가 미결수인 신분으로 격리 수감중인 옥중에서 서로 포옹하고 책을 보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사진의 촬영 경위와 유출 경로에 관해 이해하기 어려운 기괴한 사건이라고 하여 괴사진이라고 불린 사건이다.

정의
1926년, 일본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박열 부부의 사진이 유출되어 일본 정계에 혼란을 야기하고, 한국사회와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인 사건.
발단

박열 부부 사진 사건은 일명 ‘박열 부부 괴사진(怪寫眞) 사건’으로도 일컬어진다. 사진은 박열(朴㤠, 19021974)과 그의 동지이자 일본인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가 주1인 신분으로 격리 수감중인 옥중에서 서로 포옹하고 책을 보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사진의 촬영 경위와 유출 경로에 관해 이해하기 어려운 기괴한 사건이라고 하여 괴사진이라고 불린 사건이다. 괴문서 형태로 일본 언론 매체에 배포된 1926년 7월 29일 이후 이 사진은 언론 매체에 주2되는 것이 금지되었고, 1927년 1월 19일 주3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박열 부부 사진 사건은 일본과 조선의 사회와 정계에 여러 논란을 일으키며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경과 및 결과

경상북도 문경 출신인 박열은 제2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가한 바 있으며 일본에서의 유학 당시 사회운동가인 오스기[大杉榮], 사카이[堺利彦] 등과 접촉하면서 사회운동가가 되었다. 1921년 조봉암(曺奉岩) 등 20여 명과 함께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고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가담하는 한편, 1922년에는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풍뢰회'[風雷會, 일명 黑友會]를 결성하였다. 또한 1923년에는 아나키즘[Anarchism]사상을 보급하는 비밀 결사 대중단체 ‘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박열은 연인이었던 가네코와 함께 1923년 9월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 결혼식에서 일본 천황과 황실 요인을 폭살하려는 거사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23년 9월 1일 관동(關東)대지진의 여파로 일본 군부는 조선인과 급진적 사회단체에 대한 검속을 단행할 것을 목표로 하여 행정집행법 제1조 “구호를 요한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 필요한 검속”을 한다는 법령을 제정했다. 박열과 후미코는 1923년 9월 3일 보호검속 대상으로 검거되었다.

불령사의 동인으로서 박열 등과 함께 체포되어 심문을 받던 니야마 하쓰요[新山初代]는 검찰에게 박열이 황태자 결혼식에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진술하였다. 실행 여부와 관계없이 대역 사건이었으므로 박열과 가네코 등 불령사 동인들은 1923년 10월 도쿄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의해 ‘히로히토 황태자의 결혼식장에 폭탄을 던져 황태자와 정부 고관을 암살하려 한 음모 사건’으로 치안경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는 한편 1924년 2월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 혐의로 추가 기소되었다. 1925년 7월 지금의 일본 최고재판소 격인 대심원(大審院)은 박열과 가네코를 불령사라는 불법 단체 조직과 형법 제73조 “천황, 태황태후, 황태후, 황후, 황태자 또는 황태손에 대하여 위해를 하거나 하려고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 및 ‘폭발물단속벌칙’ 위반으로 정식 기소해서 재판에 넘겼다.

박열과 가네코의 첫 공판이 1926년 2월 26일 도쿄대배심원 대법정에서 열린 지 한 달 만에 결심이 진행되었다. 두 사람은 최종 선고 공판이 있기 이틀 전 도쿄의 우시고메[牛込] 구청에 결혼신고서를 제출하고, 정식 부부가 되었다. 1926년 3월 일본 대심원은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열흘 후 천황의 ‘은사'(恩赦)라는 명목하에 주4으로 주5 신분으로 전환된 박열은 1926년 4월 6일 이치가야형무소에서 도쿄 동북쪽의 지바[千葉]현의 지바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가네코는 이틀 후인 4월 8일 도치기[栃木]현 우쓰노미야[宇都宮]형무소 도치기지소로 이감 수용되었다. 그러나 석 달 정도가 지난 7월 23일 임신한 상태로 형무소 안에서 사망했고 일본 사법 당국은 자살로 발표하였다.
가네코가 사망한 직후 도쿄에는 박열과 가네코가 같이 찍은 사진 한 장과 몇 가지 문서가 누군가에 의해 시중에 유포되었다. 이른바 ‘박열 부부 괴사진 유포 사건’이 터진 것이다. 가네코 사망 일주일 후인 8월 1일 자 『동아일보』는 ‘박열과 문자에 관계된 괴문서’, ‘박열과 문자에 관계된 사진과 문서 극비밀리에 경시청에서 활동 개시’, ‘동경경시청 활동 개시’라는 제목으로 도쿄에서 전송한 기사를 게재했다.

그러나 뉴스의 대상인 사진이 일본 정부 당국의 언론 게재 금지를 통해 사진의 실체를 접할 수 없던 대중들은 사건에 대한 각종 궁금증과 추측을 양산했으며 정치 문제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과 각종 정치문제로 확산되고 있던 본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일본 의회가 개회 중이던 1927년 1월 20일 박열과 가네코 부부의 괴사진과 관련 문서의 보도 게재 금지를 해제하였다. 각 신문에 괴사진의 이미지가 크게 인쇄되어 실리고, 같이 유포된 문서의 내용이 발표되었다. 『동아일보』[1927년 1월 21일자] ‘법정에서 포옹한 박열 부처[법뎡에서 포옹한 박렬의부처, 法廷에서 泰然 抱擁 監房에서 兩人同居]’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사진이 세상에 알려지자 여러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제기되었다. 가네코의 옥중 임신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사진을 찍은 사람은 누구인지, 괴사진이 감옥에서 밖으로 어떻게 유출되었는지, 이 사진을 복제해서 시중에 유포한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목적인지에 대한 의문점 등이었다.

박열 부부의 사진은 일본의 사법 및 교정 체제의 문제를 여실히 드러냈는데 이는 사진과 함께 공표가 된 괴문서의 내용에서도 확실하게 드러났다.

괴문서의 내용은 첫째, 재판 전 일본의 이치가야[市谷]형무소 미결 독방에서 사법 당국이 박열 부부를 너무 우대했고, 둘째 예심정(豫審廷)에서 박열과 가네코가 다테마쓰[立松] 판사를 앞에 두고 30분 동안이나 같이 있었으며, 셋째 재판이 확정된 다음에 박열 부부가 박열의 독방에 수시간 함께 있도록 허락을 받았으며, 넷째 가네코의 임신 사실이 드러나 당국이 대책을 강구했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마지막으로 가네코의 시신에 이상한 점이 있어 자살로 보기 어렵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괴사진과 괴문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일본의 사법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큰 문제가 있으며, 이는 국가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므로 내각이 총사퇴해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의의 및 평가

박열 부부의 괴사진 사건은 20세기 초 일본과 조선 사회에 정치 사회 문제로까지 확산되어 사진의 사회적 파급력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주석
주1

법적 판결이 나지 않은 상태로 구금되어 있는 피의자 또는 형사 피고인. 우리말샘

주2

글이나 그림 따위를 신문이나 잡지 따위에 실음. 우리말샘

주3

금지하던 것을 풂. 우리말샘

주4

죄를 지은 사람을 평생 동안 교도소에 가두고 작업을 시키는 형벌. 우리말샘

주5

재판이 끝나 형이 확정이 되어 형 집행을 받고 있는 사람.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오혜리(명지대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연구교수, 한국사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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