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사상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Platon)으로부터 맹아(萌芽)를 찾아볼 수 있으나, 구체적·현실적 운동으로 나타난 것은 19세기 중반의 서유럽에서이다. 즉 산업혁명이 가져온 부정적이고 비인간적인 결과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것이다. 초기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푸리에(F. M. C. Fourier)·생시몽(Saint-Simon)·오웬(R. Owen) 등이었다. 이들은 당시의 사회적 위기는 개인주의에 있다고 보고 집합주의적인 공동체사회를 이상형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다분히 추상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비판과 극복방안을 제시하였다. 마르크스(K. Marx)와 엥겔스(F. Engels)는 1848년 『공산당선언』에서 초기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을 공상적 사회주의(utopian socialism)라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과학적 분석을 통하여 자본주의는 그 내재적인 모순에 의하여 공산주의 사회로 필연적으로 이행하게 되는데, 그 역사적 과도기로서 사회주의 사회가 존재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의 역할과 임무는 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이들의 입장은 이후 과학적 사회주의(scientific socialist)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이론적인 분석에 그친 것이 아니라, 1864년 제1차 인터내셔널(The First International)이라 불리는 국제노동자협회(The 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를 조직하여 혁명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조직은 1871년 프랑스에서 수립된 파리 코뮌이 붕괴되면서 마침내 1876년 해체되었다.
그 뒤 유럽 각국에서는 사회주의정당들이 속속 출현하여 마침내 1891년 독일의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을 중심으로 하여 제2인터내셔널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제1차 인터내셔널과 같은 단일지도체제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주의자들의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각국 사회주의자들은 국제적인 연대를 깨고 그들 조국의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러시아에서 레닌이 이끄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면서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제2차 인터내셔널의 입장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면서 191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제3인터내셔널을 새로이 조직하였다.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이라고 하는 이 조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 사회주의 정당, 공산주의 정당들 사이의 연계를 강화하고 그들의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여 궁극적으로 세계혁명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한국에서 이상향에 대한 염원은 오래된 것이었다. 조선조 광해군 때 허균(許筠)은 『홍길동전』에서 율도국(硉島國)으로, 연암 박지원은 『허생전』에서 나오는 율려국(律呂國)으로 낙원, 이상국가에 대한 꿈과 동경을 문학작품을 통해서 표현하였다. 또한 동학(東學)은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통한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이상향,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이 사회주의란 용어로 표현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었다.
근대 시기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처음으로 소개가 된 것은 이미 한말(韓末)인 1880년대 『한성순보(漢城旬報)』등의 신문을 통해 유럽의 사회당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가 이루어졌고, 1908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에는 외국 아나키스트의 테러활동에 대한 기사가 소개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소개된 사회주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아나키즘, 길드사회주의, 페이비어니즘(Fabianism) 등 복잡다기한 조류들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수용된 계기는 무엇보다도 1919년 3·1운동의 영향이었다. 3·1운동은 식민지 민중에게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성과 대중적인 정치의식을 각인시키는 거대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3·1운동 직후 작성된 한용운의 『조선독립의 서(朝鮮獨立의 書)』와 1920년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등에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결과에 따른 세계사의 새로운 전개를 언급하고 있었다. 또한 3·1운동 직후 조직된 ‘조선민족독립대동단’은 1919년 9월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사회주의를 철저적으로 시행한다’는 노선을 내걸기도 하였다. 1916년 김철수, 장덕수 등 일본유학생들이 결성한 ‘신아동맹당그룹’은 1920년 6월 서울에서 사회혁명당을 결성하여 ‘계급타파’와 ‘사유제도타파’, ‘무산계급 전제정치’를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일간지와 정기 간행물은 유물사관, 소비에트 혁명정부와 레닌에 관한 기사를 종종 다루고 있었다. 『동아일보(東亞日報)』는 1921년 6월 3일부터 8월 31일까지 무려 73회에 걸쳐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표제하에 그의 일생, 활동, 볼세비키혁명 등을 연재하였다. 1920~1922년 무렵 국내에서 발간된 『개벽(開闢)』, 『공제(共濟)』, 『아성(我聲)』, 『신생활(新生活)』등 잡지에는 마르크스의 계급, 계급의식,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대한 사상과 러시아의 사상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등 무정부주의에 대한 글이 소개되었다. 1921년 3월 『아성(我聲)』창간호에는 윤자영(尹滋瑛)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의 「서문」의 일부를 번역한 「유물사관요령기(唯物史觀要領記)」가 소개되었다. 1923년 『신생활(新生活)』에 게재된 정백(鄭栢)의 「노농로서아의 문화시설(勞農露西亞의 文化施設)」에는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 이후 건설된 노농정부는 미술, 연극, 문학, 교육, 정치경제학, 사회과학 등 각 부분에서 새로운 민중적 문화를 성장시키고 있음을 소개하였다.
이와 같이 식민지하에서 사회주의 이념은 러시아혁명의 영향과 1차대전 직후 고양된 국제혁명운동의 영향, 민족자결주의론에 대한 자각 등의 국제적 조건과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따른 민족적, 계급적 모순의 첨예화, 3·1운동 이후 정치의식의 고양 등을 계기로 국내 신문, 잡지 등의 언론매체를 통해 수용되었다. 국내에서 3·1운동을 거치면서 일부 민족주의자와 식민지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론적·실천적 무기력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고, 사회주의 사상을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적 무기로서 수용하게 되는 사회주의운동이 본격화 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는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와 지역적으로 인접하고, 러시아지역에 한인사회주의단체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국내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는 동시에 사회주의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에 사회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도입, 수용되기 이전 러시아 지역에 이주해간 조선인들은 러시아혁명을 직접 경험하고 참가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사회주의 사상 수용과정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다른 사상적 조류와의 갈등을 겪지 않고 곧바로 전위당을 창립하게 되었다.
1918년 5월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이들은 1919년 5월 블라디보스톡에서 한인사회당대표자회를 열고 신민회 ‘좌파’세력을 포함하여 당조직을 확대하였다. 이 대회에서 한인사회당은 조선혁명에 대한 전술문제, 코민테른 가입문제, 코민테른에 한인사회당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여 박진순 등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였다. 이후 한인사회당은 이동휘가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부임하면서 활동무대를 상해로 옮기게 되었고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상해파)을 창립하였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강령」에서 ‘민족적 해방이 사회혁명의 전제’이고, ‘이 역시 곧 세계혁명의 달성’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상해파’는 러시아와 중국에서 주로 활동하였지만 그들의 목적은 국내 식민지 조선을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 동시에 사회주의 국가를 세워야겠다는 것이었다. 고려공산당 「선언서」는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 입각하여 민족해방운동과 무산대중의 해방을 토로하였고, 고려공산당 「강령」은 “우리는 무산계급의 집정(執政)을 자본주의의 폭위로부터 인류를 해방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또 보편적 절대 자치의 소비에트정치를 무산계급 집정의 유일의 정체(政體)”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강령」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의한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을 최대 강령으로 하였다.
또한 1920년 1월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공산당 이르쿠츠크현 위원회 산하에 한인공산당이 창립되었고 이들도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을 창립하였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라는 두 개의 고려공산당이 동시에 결성된 것이다. 이들은 국내의 정세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국내에 전위정당을 조직하려 하였다.
3·1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수많은 운동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선청년회연합회기성회와 조선노동공제회 등은 전국에 존재하는 노동, 농민, 청년단체를 망라하는 위상을 가지고 조직되었다. 1920~1922년 무렵 이들 내부에는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이 혼재되면서 그 내부 분화과정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이 무렵 국내의 대표적인 사상단체로는 1921년 서울청년회(‘서울파’), 1923년 북성회(1924년 북풍회, ‘북풍파’), 1923년 신사상연구회(1924년 화요회, ‘화요파’), 1924년 조선노동당 등이 있었다. 이들은 제각기 그 이면에 ‘공산주의 그룹’들을 비밀리에 가지고 있으면서 사상단체로서 합법적 활동을 하였다. 서울청년회 내부에는 고려공산동맹이, 북풍회 내에는 까엔당(까엔당은 러시아어 КНДан으로 조선(고려)인민당 또는 조선(고려)민중당으로 추정된다)이, 조선노동당 내에는 스파르타쿠스당이 존재하였다. 화요회는 코민테른과 직접적으로 조직적 관계를 맺으면서 주로 러시아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계열의 사회주의자들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면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사회주의 그룹들이 독자적인 모습을 띠고 등장하게 되는 데에는 1922년 1월 ‘김윤식사회장사건’과 1922년 4월 ‘사기공산당사건’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921년 1월 한말의 대제학을 지냈고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았던 김윤식의 장례를 둘러싸고 ‘일부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 내부에 의견대립으로 결국 ‘김윤식 사회장’은 무산되었다. 또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국내간부가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자금의 일부를 사적으로 남용하였다고 하여 이들을 주요 대중단체인 조선청년회연합회, 노동공제회, 서울청년회에서 축출하는 사건인 ‘사기공산당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세력’은 민족해방운동의 주도적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한편 화요파, 북풍파, 조선노동당, 서울파 등 ‘사회주의그룹’은 이 무렵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 등 전국적인 대중운동체를 조직한 이후 본격적으로 국내에 전위당으로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려고 하였다. 마침내 1925년 4월 17일 을지로 아서원에서 비밀리에 김재봉(金在鳳), 김약수(金若水), 조동호(趙東祜), 조봉암(曺奉岩), 박헌영(朴憲永) 등 19명의 사람들이 모여 조선공산당 창건을 선포하였다. 1925년 8월 조동호의 코민테른 보고에 따르면 “조선공산당은 독립운동이 조선인 전체의 이익을 목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이라고 바라보았다. 또한 그것이 조선프롤레타리아가 일본자본주의에 대하여 서있는 동일한 전선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공산당은 1928년 「12월테제」로 해체될 때까지 3년여 동안 네 번에 걸친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과 검거 속에서 세차례의 당대회를 열고 노동자·농민운동, 청년·학생·여성운동, 신간회운동 등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1926년 6·10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여 3·1운동과 유사한 대중운동을 조직하려 하였다. 1928년 코민테른 6차대회에서 채택된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테제와 사민주의의 사회파시즘 규정 등 ‘계급 대 계급’ 전술의 기조는 그해 12월 10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에서 채택한 「조선의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결의」(「12월테제」)에 반영되었다. 노동자, 농민에 기초한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지시한 「12월테제」는 명시적으로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가져왔다.
1929년 이후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서울상해파, ML파, 화요파 등 조선사회주의운동 각 분파는 제각기 당재건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재유의 경성트로이카그룹(19331936년), 박헌영의 경성꼼그룹(19391941년) 등의 활동이 있었지만 일제하의 당재건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일제하 한국 사회주의운동은 중국, 인도, 베트남 등 식민지·반(半)식민지 국가의 사회주의운동과도 매우 유사성을 지닌다. 이들 국가에서도 사회주의의 수용과 공산당의 결성은 반제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이었고, 초기 당결성 과정은 여러 이념·조직 노선을 달리하는 사회주의그룹(Group), 경향(Tendency), 분파(Faction) 사이의 우여곡절 속에서 이루어졌다. 당결성 과정에서의 이러한 복잡함은 동아시아 뿐 아니라 세계 사회주의운동사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또한 1920~30년대 각국의 사회주의운동은 코민테른(Comintern)의 영향하에 있었다. 코민테른은 세계 각국의 사회주의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식민지 조선의 구체적 특수성을 간과하여 유럽이나 중국의 상황을 그대로 적용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였다. 사회민주주의의 사회파시즘론이나 민족부르주아지에 대한 ‘초좌익적’ 경향 등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박헌영 등 과거 화요파가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통하여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은 「8월테제」(「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통해 소련과 함께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인식하고 미소협력에 따른 평화적 정권수립을 전망하였으며, 당면 혁명의 성격과 과제를 반제반봉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였다. 해방후 조선공산당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등 노동, 농민운동 조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미군정시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실질적으로 지도하는 활동을 하였다.
한편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당으로 북조선로동당(북로당)이 창립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남한에서 3당합당이 적극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인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노동자 농민 소시민 인테리 등 모든 근로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신민당 공산당 인민당의 합동은 조선 민족통일의 기초를 구축하고 민주진영의 주도체를 완성하는 것”으로 “신민당 중앙위원회와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3개당을 1대 정당으로 통일할 것으로 제안”하였다. 3당합당에 대하여 여운형은 “합동은 현단계의 민주주의적 과업을 가장 성실히 또 능률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주도력을 광범한 인민의 정당으로 일원화함으로써 민주주의 전체역량의 일층 능동적 강화를 기하는 것”이라 하면서 극소수 독점대지주, 대재벌과 특권 야망가들의 경제적 정치적 군림에서 광범한 인민층을 해방시키는 ‘광범한 인민적 민주주의과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3당합당의 구체적 절차와 방법을 둘러싸고 조선공산당과 인민당, 신민당은 엄청난 내분에 휩쓸렸다. 조공은 즉각 합당을 주장하는 간부파와 합당에 앞서 당대회 소집을 요구하는 대회파로 나뉘었고, 인민당은 좌우합작을 중지하며 총역량의 확대강화를 위해 3당합당을 추진하자는 김오성 등의 합당추진파(48인파)와 장건상, 이여성 등의 합당신중파(31인파)
로 나뉘어 결국 표결에 부쳐져 48대 31로 합당이 결정되었다. 신민당은 부위원장 정로식 등 합당 적극파(중앙파)와 백남운 등의 신중파(반중앙파)로 나뉘었다.
이런 가운데 미소공위의 결렬과 조공의 신전술채택 등 정세는 급박하게 진전되어 갔고, 우여곡절에도 3당합당은 급속히 추진되어 1946년 9월 4일 남조선노동당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선언과 강령초안을 발표하고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반면 3당합당을 반대하는 조공 대회파와 인민당 31인파, 신민당 반중앙파는 1946년 10월 16일 사회노동당 결성을 추진하였다. 계급정당에서 진보적 대중정당으로 전환을 의도한 3당합당은 결과적으로 남로당과 사로당으로의 분리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