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월 10일~13일 4일간 경상남도 진주에서 경상남도노농운동자간친회(慶尙南道勞農運動者懇親會)가 개최되어 노동문제, 소작문제 기타 여러 사회문제를 결의하였다. 1월 13일 마지막 날에 조선 노농 운동에 큰 영향력을 가진 남한 각지 단체의 단결을 위하여 남선노농동맹회(南鮮勞農同盟會) 창립 발기의 결의를 하였다.
1924년 3월 9일부터 2일간 최원택(崔元澤), 박이규(朴珥圭), 정운해(鄭雲海), 서정희(徐廷禧) 등이 중심이 되어 대구에서 남선노농동맹창립대회(南鮮勞農同盟創立大會)가 개최되었다. 3월 9일 총 가맹단체 141개, 출석대표 58명으로 제1일의 회의가 열려 집행위원 49명을 선출하였다.
제2일에는 제1회 집행위원회가 개최되어 14명의 중앙 상임 집행위원을 선출하였다. 위원장 서정희 및 정운해, 김정규(金正奎), 최원택, 박병두(朴炳斗) 등 14인이었다. 또한 “①노농민의 서로 관계에 대한 일은 물론 연락을 취할 일 ②각 지방 소작 상황 조사의 건 … ⑩생산과 소비조합에 관한 건 ⑪농촌 고용에 관한 건 ⑫군 농회에 관한 일 ⑬동양척식회사의 건 ⑭청년 단체 조직의 건 … ⑰여성 단체 조직의 건” 등 결의 사항과 “一. 우리는 단결의 힘으로써 노동계급의 해방을 기함. 一. 우리는 완전무결한 사회의 실현을 기하는 동시에 각각의 복리증진과 생활 향상을 도모함. 一. 노동운동의 전력을 집중하기 위하여 전국적 총 단결의 촉성을 기함.” 이라는 「강령」을 채택했다.
남선노농동맹창립대회에서는 또한 앞으로 전국적인 노농조직을 결성하기 위하여 정운해, 서정희, 김종범(金鍾範), 이헌(李憲), 지건홍(池建弘) 외 5명을 합한 10명의 '전조선노농단체연합기관기성교섭위원(全朝鮮勞農團體聯合機關期成交涉委員)'도 선출하였다.
북풍파가 주도한 남선노농동맹은 화요파의 조선노동연맹회, 서울파의 조선노농대회와 더불어 1924년 4월 20일 창립되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의 하나의 주체가 되었다.